김익(金熤)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AE40C775FFFFB1723X0 |
자(字) | 광중(光仲) |
호(號) | 약현(藥峴) |
시호(諡號) | 문정(文貞) |
생년 | 1723(경종 3) |
졸년 | 1790(정조 14)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연안(延安)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김상석(金相奭) |
5대조 | 김제남(金悌男) |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익(金熤)
1723년(경종 3)∼1790년(정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광중(光仲), 호는 죽하(竹下)‧약현(藥峴). 김제남(金悌男)의 5대손으로, 부친은 판돈녕부사 김상석(金相奭)이다.
1763년(영조 39)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되고, 이듬해 왕이 인원왕후(仁元王后: 肅宗繼妃)의 제삿날을 맞아 매일같이 불공을 드리는 것을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었다. 뒤에 석방되어 응교에 제수된 뒤 1769년에 세자시강원 겸 필선에 임명되었고, 1778년(정조 2)에 대사헌이 되었다.
1782년 강화유수를 거쳐 이듬해에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에 임명되었다.
1784년 우의정으로 진주 겸 주청사의 정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1786년에 또다시 동지사은사(冬至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89년 우의정에서 물러났으나 바로 영의정에 올랐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763년(영조 39)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되고, 이듬해 왕이 인원왕후(仁元王后: 肅宗繼妃)의 제삿날을 맞아 매일같이 불공을 드리는 것을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었다. 뒤에 석방되어 응교에 제수된 뒤 1769년에 세자시강원 겸 필선에 임명되었고, 1778년(정조 2)에 대사헌이 되었다.
1782년 강화유수를 거쳐 이듬해에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에 임명되었다.
1784년 우의정으로 진주 겸 주청사의 정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1786년에 또다시 동지사은사(冬至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89년 우의정에서 물러났으나 바로 영의정에 올랐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續朝野輯要
正祖實錄
國朝榜目
續朝野輯要
[집필자]
원유한(元裕漢)
명 : "익(熤)"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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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