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원(朴盛源)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C15C131C6D0B1711X0 |
자(字) | 공무(公茂) |
시호(諡號) | 문헌(文憲) |
생년 | 1711(숙종 37) |
졸년 | 1779(정조 3)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반남(潘南)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박사한(朴師漢) |
외조부 | 김창협(金昌協) |
저서 | 『연설가관(筵說可觀)』 |
[상세내용]
박성원(朴盛源)
1711년(숙종 37)∼1779년(정조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공무(公茂). 승지 박세성(朴世城)의 현손이고 박사한(朴師漢)의 아들이며, 외조부는 김창협(金昌協)이다.
1743년(영조 19)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설서(說書)를 거쳐, 정언(正言)이 되었을 때는 차대(次對)할 때 왕에게 주달(奏達)한 말의 기록을 고치려 하다가 삭탈관직을 당하였다.
그뒤 복관되어 사서(司書)‧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1765년(영조 41)에는 대사간에 재직시 이담(李潭)을 논핵(論劾)하다가 죽음을 당한 남강로(南絳老)의 신원(伸寃)과 그 복작(復爵)을 청하다가 흑산도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연설가관(筵說可觀)』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1743년(영조 19)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설서(說書)를 거쳐, 정언(正言)이 되었을 때는 차대(次對)할 때 왕에게 주달(奏達)한 말의 기록을 고치려 하다가 삭탈관직을 당하였다.
그뒤 복관되어 사서(司書)‧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1765년(영조 41)에는 대사간에 재직시 이담(李潭)을 논핵(論劾)하다가 죽음을 당한 남강로(南絳老)의 신원(伸寃)과 그 복작(復爵)을 청하다가 흑산도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연설가관(筵說可觀)』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國朝榜目
國朝榜目
[집필자]
이원균(李源鈞)
대표명 | 박성원(朴盛源) |
성명 | 박성원(朴盛源) |
성명 : "박성원(朴盛源)"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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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