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주(任命周)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84BA85C8FCB1705X0 |
자(字) | 백신(伯新) |
생년 | 1705(숙종 31) |
졸년 | 1757(영조 33)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풍천(豊川)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관련정보]
[상세내용]
임명주(任命周)
1705년(숙종 31)∼1757년(영조 33). 조선 중기 문신. 자는 백신(伯新)이다. 본관은 풍천(豊川)이다.
증조부는 임승(任陞)이고, 조부는 임사원(任士元)이다. 부친 함흥판관(咸興判官) 임적(任適)과 모친 증 이조판서(贈吏曹判書) 윤부(尹扶)의 딸 파평윤씨(坡平尹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동생으로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가 있다.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째 부인은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의 증손이자 김언겸(金彦謙)의 딸 안동김씨(安東金氏)이고, 둘째 부인은 통덕랑(通德郞) 허규(許珪)의 딸 양천허씨(陽川許氏)이다.
1733년(영조 9) 식년시 생원 2등 14위로 합격하였으며, 1747년(영조 23) 식년시 갑과 2등으로 문과 급제하였다. 그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있을 때 이미 삼사(三司)에서 이광좌(李光佐)와 조태억(趙泰億)의 관작을 추삭(追削)하자는 계문(啓文)을 올린 일이 있었다. 그 뒤 홍서(洪曙)와 남덕로(南德老) 등으로 인하여 삼사에 들어가는 사람은 계문을 연속하여 올리지 못하게 되었다.
10항목의 계문을 올려 참된 탕평(蕩平)을 구하고자 하였다가 임금의 진노를 얻어 제주도로 유배를 갔다가 1748년 나주(羅州)로 옮겨졌으나 1750년(영조 26) 풀려났다.
조정에서 균역청(均役廳)을 설치하고 역법을 바꾸자, 법령의 좋지 못한 점을 보고 결포(結布)‧호전(戶錢)‧속오(束伍)의 법을 상세하게 서술하여 저서 『칠실만주(漆室漫籌)』를 엮었다. 만년에 주자서(朱子書)에 심취하여 성리설(性理說)에 조예가 깊어졌다.
슬하에 아들이 없어 임정주(任靖周)의 아들 임렬(任烈)로 대를 이었다.
묘는 충청북도 문의(文義: 현 청원군(淸原郡))에 있었는데, 1762년(영조 38) 충청남도 공주(公州) 선영으로 이장하였다.
증조부는 임승(任陞)이고, 조부는 임사원(任士元)이다. 부친 함흥판관(咸興判官) 임적(任適)과 모친 증 이조판서(贈吏曹判書) 윤부(尹扶)의 딸 파평윤씨(坡平尹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동생으로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가 있다.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째 부인은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의 증손이자 김언겸(金彦謙)의 딸 안동김씨(安東金氏)이고, 둘째 부인은 통덕랑(通德郞) 허규(許珪)의 딸 양천허씨(陽川許氏)이다.
1733년(영조 9) 식년시 생원 2등 14위로 합격하였으며, 1747년(영조 23) 식년시 갑과 2등으로 문과 급제하였다. 그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있을 때 이미 삼사(三司)에서 이광좌(李光佐)와 조태억(趙泰億)의 관작을 추삭(追削)하자는 계문(啓文)을 올린 일이 있었다. 그 뒤 홍서(洪曙)와 남덕로(南德老) 등으로 인하여 삼사에 들어가는 사람은 계문을 연속하여 올리지 못하게 되었다.
10항목의 계문을 올려 참된 탕평(蕩平)을 구하고자 하였다가 임금의 진노를 얻어 제주도로 유배를 갔다가 1748년 나주(羅州)로 옮겨졌으나 1750년(영조 26) 풀려났다.
조정에서 균역청(均役廳)을 설치하고 역법을 바꾸자, 법령의 좋지 못한 점을 보고 결포(結布)‧호전(戶錢)‧속오(束伍)의 법을 상세하게 서술하여 저서 『칠실만주(漆室漫籌)』를 엮었다. 만년에 주자서(朱子書)에 심취하여 성리설(性理說)에 조예가 깊어졌다.
슬하에 아들이 없어 임정주(任靖周)의 아들 임렬(任烈)로 대를 이었다.
묘는 충청북도 문의(文義: 현 청원군(淸原郡))에 있었는데, 1762년(영조 38) 충청남도 공주(公州) 선영으로 이장하였다.
[참고문헌]
鹿門集
[집필자]
정도상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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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3 | 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