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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후담(愼後聃)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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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이로(耳老)
호(號)돈와(遯窩)
생년1702(숙종 28)
졸년1761(영조 37)
시대조선후기
본관거창(居昌)
활동분야학자 > 유생
신구중(愼九重)
저서『서학변(西學辨)』
저서『소학차의(小學箚疑)』
저서『주역상신편(周易象新編)』
저서『중용해(中庸解)』
저서『서학변』

[상세내용]

신후담(愼後聃)
1702년(숙종 28)∼1761년(영조 37).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이로(耳老), 호는 하빈(河濱) 또는 돈와(遯窩).
1. 가계
통훈대부 신구중(愼九重)의 아들이다.

1723년(경종 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그뒤 과거를 포기하고 오로지 성리학(性理學)의 연구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하였다.
2. 이익에게 수학
1724년 1월에 이익(李瀷)을 처음 찾아뵙고 그뒤부터 변함없이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처음 이익을 만나본 그는 이익의 실학적인 학풍에 깊이 감동하였다. 그가 뒷날 실학자로 성장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이익을 만나본 자리에서 서학(西學), 곧 천주학에 관한 미지의 학문세계를 접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곧 서학에 관한 서적들을 구하여 열심히 연구하였다. 이리하여 이해에 천주교를 철저히 비판한 『서학변(西學辨)』을 지었던 것이다. 이 무렵에 그는 건강이 나빠져 잠시 책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되도록 삼갔다.

반면 일상생활의 실천윤리에 힘을 쓰는 계기로 삼고 『소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뒤 『소학차의(小學箚疑)』를 저술하기에 이르렀다.
3. 연구와 저술
그러나 그는 건강이 회복되자 1728년(영조 4)부터 다시 활발한 연구와 저술활동에 들어갔다. 그는 이익을 찾아가거나 편지를 통하여 의심나는 분야를 확인하였고, 새로운 지식도 얻으면서 주로 『중용』『역경』의 연구에 힘썼다.

1734년에는 그동안 연구해온 『주역』에 자신의 새로운 견해를 붙인 『주역상신편(周易象新編)』 7권을 완성하였고, 1742년에는 『중용해(中庸解)』를 저술하였다. 그는 『중용』을 연구해온 결과 장절(章節)에 대해서는 주자(朱子)와 견해를 달리하였다.

이와같이 그는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연구와 저술활동에만 몰두하였다.
4. 서학변 저술
그는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서학변』이다. 이 책은 명나라중국에서 활동한 야소회(耶蘇會, Societas Jesu) 신부들이 지은 책들 가운데서 『영언여작(靈言蠡勺)』『천주실의(天主實義)』『직방외기(職方外記)』를 차례로 비판한 것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하여 서양의 스콜라철학에서 내세우는 영혼과 신(Deus)을 성리학의 견지에서 비판하였다. 영혼에 대해서는 사람이 죽은 뒤에 없어진다고 하여 영혼불멸설을 비판하였다. 이는 스콜라철학에서 말하는 영혼(anima)이 성리학에서 말하는 본성(本性)에 가까운 것이라는 점이 그에게는 이해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 곧 천주에 대해서도 그는 천주가 만물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있는 만물을 다스릴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천주를 상제(上帝)라고 이해하였는데, 이는 상제와 만물의 관계는 사람의 마음과 몸의 관계와 같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마음이 몸을 낳지 않고 다만 다스릴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천주와 영혼의 불멸을 내세우고 또 천당과 지옥을 믿는 서학은 어디까지나 불교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한 종파라고 보았다.

그런데 당시 그의 스승인 이익은 서학의 정연한 논리나 주의주장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의 제자들에게도 깨우쳐주었는데, 이때 그는 이익에게서 서학을 소홀히 보아 넘기지 말라는 충고를 들었다.

그는 23세라는 젊은 나이에 『서학변』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을 저술하기 위하여 『영언여작』『천주실의』『직방외기』 등의 천주서적을 탐독하고 이를 철저히 검토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자연히 종교‧철학‧문물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그 결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리학의 좁은 테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더구나 이익의 가르침은 한층 더 그를 발전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그랬듯이 전근대적인 성리학에 물들어 있어서 서학에 대해서는 너무나 이단시하였기 때문에 서학연구에서 얻은 새로운 지식들조차도 그렇게 충분히 활용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물론 『중용』이나 『역경』의 해석에 그의 독자적인 견해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새로운 해석이 성리학을 극복하는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의 학문적인 업적이 스승인 이익의 눈에 들지 못하였고, 심지어는 10년 아래이기는 하지만 이익의 제자 안정복(安鼎福)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은듯하다.

다만 그가 학계에 알려진 것은 이만채(李晩采)가 찬한 『벽위편(闢衛編)』이 1931년에 간행된 뒤의 일로서 여기에 『서학변』이 실려 있다. 그가 단지 서학을 비판하였다는 것만으로는 실학자라 볼 수 없으며 그의 성리학적인 저술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통해서만 밝혀질 것이다.

특히, 『중용』이나 『역경』의 해석에서 주자와 다른 그의 학문적인 성과가 드러나리라 본다.

[참고문헌]

星湖全書
河濱雜著
國朝人物志
愼後聃‧安鼎福의 西學批判에 관한 硏究(崔東熙, 高麗大學校博士學位論文, 1975)

[집필자]

최동희(崔東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