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부(李光溥)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AD11BD80B1694X0 |
자(字) | 자연(子淵) |
생년 | 1694(숙종 20) |
졸년 | 1773(영조 49)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평창(平昌)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이명석(李命錫) |
[상세내용]
이광부(李光溥)
1694년(숙종 20)∼1773년(영조 4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창(平昌). 자는 자연(子淵). 판서 이계남(李季男)의 후손이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이명석(李命錫)의 아들이다.
1715년(숙종 4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승문원정자에 임명되었다.
그뒤 장령‧헌납‧집의를 거쳐, 승지에 이르렀다.
1756년(영조 32) 경성부사로 재임중 힘을 다하여 기민(飢民)을 구제한 결과 돌아올 때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해어진 침구뿐이었다 한다. 목민관으로서 백성들에게 진력하여 처자를 제대로 돌보지 않을 정도로 청백하였다.
당시 정승인 김재로(金在魯)는 “그를 등용하지 않으면 어찌 다른 인물을 쓰겠는가.”라고 반문하였으며, 여러 중신들도 한결같이 그의 인물됨을 칭찬하였다.
그뒤 숭록대부 중추부사가 되어 치사하였다.
1715년(숙종 4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승문원정자에 임명되었다.
그뒤 장령‧헌납‧집의를 거쳐, 승지에 이르렀다.
1756년(영조 32) 경성부사로 재임중 힘을 다하여 기민(飢民)을 구제한 결과 돌아올 때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해어진 침구뿐이었다 한다. 목민관으로서 백성들에게 진력하여 처자를 제대로 돌보지 않을 정도로 청백하였다.
당시 정승인 김재로(金在魯)는 “그를 등용하지 않으면 어찌 다른 인물을 쓰겠는가.”라고 반문하였으며, 여러 중신들도 한결같이 그의 인물됨을 칭찬하였다.
그뒤 숭록대부 중추부사가 되어 치사하였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樊巖集
英祖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樊巖集
[집필자]
이재호(李載琥)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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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