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정명(洪廷命)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D64DC815BA85B1692X0 |
자(字) | 사흠(士欽) |
생년 | 1692(숙종 18) |
졸년 | 1748(영조 24)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남양(南陽[唐])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관련정보]
[상세내용]
홍정명(洪廷命)
1692년(숙종 18)∼1748년(영조 24) 7월 2일.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사흠(士欽)이다. 본관은 남양(南陽[唐])이다.
조부는 증 이조참의(贈吏曹參議) 홍기서(洪箕敍)이다. 부친 평양부서윤(平壤府庶尹) 홍린(洪潾)과 모친 감찰(監察) 민회(閔晦)의 딸 정부인(貞夫人) 여흥민씨(驪興閔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최수온(崔守溫)의 딸 전주최씨(全州崔氏)이다.
늦둥이로 태어나 부친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경서(經書)를 읽었는데 깨치는 것이 빠르고 정확하였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명성을 얻어 1715년(숙종 41) 성균관에 들어갔다. 1721년(경종 1) 부친이 병이 들어 위독해지자 팔을 베어 그 피를 입에 흘려드렸으며, 상(喪)을 당하자 상심이 커 병을 얻었는데 효종의 도위(都尉) 정재륜(鄭載崙)이 자주 문병을 와 ‘진정한 효자’라고 칭찬하였다.
1735년(영조 11)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시작으로 예조와 병조의 좌랑(佐郞)‧정랑(正郞)을 지냈으며 강원도사(江原都事)의 외직을 맡았다. 그 외 지평(持平)‧정언(正言)‧헌납(獻納) 등을 거쳐 1745년(영조 21) 장령(掌令)과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제수되었다.
향년 67세의 나이로 한성(漢城) 종로구(鍾路區) 정동(貞洞) 부근의 황화방(皇華坊)에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으나, 아들이 일찍 죽어 홍건(洪楗)을 양자로 들였다.
조부는 증 이조참의(贈吏曹參議) 홍기서(洪箕敍)이다. 부친 평양부서윤(平壤府庶尹) 홍린(洪潾)과 모친 감찰(監察) 민회(閔晦)의 딸 정부인(貞夫人) 여흥민씨(驪興閔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최수온(崔守溫)의 딸 전주최씨(全州崔氏)이다.
늦둥이로 태어나 부친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경서(經書)를 읽었는데 깨치는 것이 빠르고 정확하였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명성을 얻어 1715년(숙종 41) 성균관에 들어갔다. 1721년(경종 1) 부친이 병이 들어 위독해지자 팔을 베어 그 피를 입에 흘려드렸으며, 상(喪)을 당하자 상심이 커 병을 얻었는데 효종의 도위(都尉) 정재륜(鄭載崙)이 자주 문병을 와 ‘진정한 효자’라고 칭찬하였다.
1735년(영조 11)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시작으로 예조와 병조의 좌랑(佐郞)‧정랑(正郞)을 지냈으며 강원도사(江原都事)의 외직을 맡았다. 그 외 지평(持平)‧정언(正言)‧헌납(獻納) 등을 거쳐 1745년(영조 21) 장령(掌令)과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제수되었다.
향년 67세의 나이로 한성(漢城) 종로구(鍾路區) 정동(貞洞) 부근의 황화방(皇華坊)에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으나, 아들이 일찍 죽어 홍건(洪楗)을 양자로 들였다.
[참고문헌]
在澗集
[집필자]
고윤수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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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3 | 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