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기(兪迪基)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20C801AE30B1689X0 |
자(字) | 혜숙(惠叔) |
생년 | 1689(숙종 15) |
졸년 | 1763(영조 39)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기계(杞溪) |
활동분야 | 관료 |


[상세내용]
유적기(兪迪基)
1689년(숙종 15)∼1763년(영조 39). 조선 중기 관료. 자는 혜숙(惠叔)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며, 거주지는 한양이다.
증조부는 군수(郡守) 증 참판(贈參判) 유희증(兪希曾)이고, 조부는 도승지(都承旨) 유헌(兪櫶)이며, 부친은 통덕랑(通德郞) 증 의금부도사(贈義禁府都事) 유명량(兪命亮)이다. 외조부는 승지 정면(鄭勔)이다.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째 부인은 이구령(李九齡)의 딸 전주이씨(全州李氏)이고, 둘째 부인은 이만겸(李萬謙)의 딸 여주이씨(驪州李氏)이다.
부친은 태어난 지 한 살도 되기 전에 죽었다. 어려서 부친을 잃어 뜻을 펼치기가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하여 스스로를 가혹하게 닦달하며 배움에 임하여 목구멍이 붓고 아픈 인후병(咽喉病)에 걸리자 모친이 걱정하여 만류하였다. 이에 모친의 뜻에 따르겠노라 하고는 밤에 방문을 가리고 등에 불어리를 한 채 낮은 음성으로 책을 읽었다. 자라서는 문예가 숙달하였으나 지조가 엄하였던 터라 의롭지 않은 것은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다.
1721년(경종 1) 식년시 생원 2등 19위로 합격하였다. 성균관에 있을 때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크게 그른 것을 보고는 바로 경기도 가평(加平) 화악산(華嶽山)으로 들어가 낚시하고 땔나무를 하며 지냈다. 1740년(영조 16) 음직으로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에 제수되었으며, 누이의 아들 참판(參判) 서명신(徐命臣)에 의해 늙음을 이유로 사은숙배 없이 바로 관직에 나아갔다. 그 후 봉사(奉事)‧직장(直長)‧주부(主簿)‧도사(都事) 등을 지냈으며, 외직으로 평택(平澤)과 당진(唐津) 현감을 지냈다. 1763년(영조 39)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묘는 충청남도 목천(木川) 납은평(納恩坪)에 있다.
증조부는 군수(郡守) 증 참판(贈參判) 유희증(兪希曾)이고, 조부는 도승지(都承旨) 유헌(兪櫶)이며, 부친은 통덕랑(通德郞) 증 의금부도사(贈義禁府都事) 유명량(兪命亮)이다. 외조부는 승지 정면(鄭勔)이다.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째 부인은 이구령(李九齡)의 딸 전주이씨(全州李氏)이고, 둘째 부인은 이만겸(李萬謙)의 딸 여주이씨(驪州李氏)이다.
부친은 태어난 지 한 살도 되기 전에 죽었다. 어려서 부친을 잃어 뜻을 펼치기가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하여 스스로를 가혹하게 닦달하며 배움에 임하여 목구멍이 붓고 아픈 인후병(咽喉病)에 걸리자 모친이 걱정하여 만류하였다. 이에 모친의 뜻에 따르겠노라 하고는 밤에 방문을 가리고 등에 불어리를 한 채 낮은 음성으로 책을 읽었다. 자라서는 문예가 숙달하였으나 지조가 엄하였던 터라 의롭지 않은 것은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다.
1721년(경종 1) 식년시 생원 2등 19위로 합격하였다. 성균관에 있을 때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크게 그른 것을 보고는 바로 경기도 가평(加平) 화악산(華嶽山)으로 들어가 낚시하고 땔나무를 하며 지냈다. 1740년(영조 16) 음직으로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에 제수되었으며, 누이의 아들 참판(參判) 서명신(徐命臣)에 의해 늙음을 이유로 사은숙배 없이 바로 관직에 나아갔다. 그 후 봉사(奉事)‧직장(直長)‧주부(主簿)‧도사(都事) 등을 지냈으며, 외직으로 평택(平澤)과 당진(唐津) 현감을 지냈다. 1763년(영조 39)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묘는 충청남도 목천(木川) 납은평(納恩坪)에 있다.
[참고문헌]
屛溪集
[집필자]
박경이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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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3 | 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