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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응(李顯應)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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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서경(瑞卿)
생년1682(숙종 8)
졸년1732(영조 8)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주(全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상세내용]

이현응(李顯應)
1682년(숙종 8)∼1732년(영조 8).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서경(瑞卿)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세종의 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장령(掌令) 증 찬성(贈贊成) 이형(李迥)이고, 조부는 군수(郡守) 증 영의정(贈領議政) 이중휘(李重輝)이다. 부친 영의정 혜정공(惠定公) 이유(李濡)와 모친 관찰사 증 찬성 어진익(魚震翼)의 딸 정경부인(貞敬夫人) 함종어씨(咸從魚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첨정(僉正) 홍중기(洪重箕)의 딸 풍양홍씨(豊山洪氏)이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났으며, 용모 또한 빼어났다. 조금 자라면서부터 부모를 극진히 받들고 손님이 오면 응대를 잘하였다. 공부를 하는 동안에 문예(文藝)도 닦아 문장에도 뛰어나, 수차례 과거에 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부친상을 당한 후로 과거에 대한 뜻을 접었다.

그 후 천거로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으나, 세상의 도(道)가 어지러워지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730년(영조 6)에 선의대비(宣懿大妃)의 상을 치를 때 수고한 공으로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자, 다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어 남평현감(南平縣監)으로 나아갔다. 남평은 예부터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로 이름이 났으나, 나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의 재산을 내어서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휼하고 자식처럼 돌보았고, 관가의 일들은 공정하고 치밀하게 처리하여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그러다가 병이 들어 생을 마감하자 고을 백성들은 자신의 부모를 하늘이 빼앗아 갔다며 통곡하였다.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시중(李時中)‧이명중(李明中)‧이최중(李最中)이다.

묘는 경기도 광주(廣州) 광수산(光秀山) 선산 아래에 있다.

[참고문헌]

杞園集

[집필자]

이원배
수정일수정내역
2010-10-23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