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진령(成震齡)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131C9C4B839B1682X0 |
자(字) | 자장(子長) |
호(號) | 시은(市隱) |
호(號) | 나옹(懶翁) |
생년 | 1682(숙종 8) |
졸년 | 1739(영조 15)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창녕(昌寧)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관련정보]
[상세내용]
성진령(成震齡)
1682년(숙종 8)∼1739년(영조 15). 조선 중기 문신‧유학자. 자는 자장(子長)이고, 호는 시은(市隱)‧나옹(懶翁)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거주지는 한양이다.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문정공(文靖公) 성여완(成汝完)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통훈대부(通訓大夫) 행평택현감(行平澤縣監) 성하창(成夏昌)이고, 조부는 성초일(成楚逸)이며, 부친은 통덕랑(通德郞) 성인동(成麟童)이다. 형으로 성석령(成錫齡)‧성현령(成玄齡)이 있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으나 약골이라 공부를 할 수 없어 12세에 비로소 공부를 시작하여 1년 만에 『사기(史記)』를 떼었다. 이후 틈날 때마다 『춘추호전(春秋胡傳)』과 『역학계몽(易學啓蒙)』 등의 책을 종일토록 즐겨 읽었으며, 18∼19세에 이미 천여 권의 책을 읽었다.
1699년(숙종 25) 모친상을 당하고, 1705년(숙종 31) 부친 동지공(同知公)을 따라 서울 서대문 밖 덕파령(德坡嶺: 일명 됫박고개, 현 경기도 고양시 벽제동)으로 옮기면서 가계가 더욱 몰락하여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가난하였으나 형과 강독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 자신의 호를 ‘나옹(懶翁)’이라 지었다.
1711년(숙종 37) 식년시 진사 2등 8위로 합격하고, 1713년(숙종 39) 증광시 병과 22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호서(湖西: 현 충청도)에 갔을 때, 충청남도 아산군 외암(巍巖)에 거처하고 있던 이간(李柬)과 윤혼(尹焜)을 찾아가 태극(太極)과 인물성미발성(人物性未發性) 등에 대한 설을 토론하였으며, 집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편지를 왕래하며 격론하였다. 1716년(숙종 42) 겨울 충청남도 공주 이인역(利仁驛) 독우(督郵)로 나갔으나 작은 실수로 인해 1717년(숙종 43) 봄에 파직되어 집으로 돌아올 때에도 책만 챙겨서 돌아왔다.
1717년(숙종 43)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오르고, 1718년(숙종 44)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옮겼다. 1726년(영조 2) 민상진(閔相鎭)이 멀어서 역적을 토벌할 수 없었다며 낸 사직상소에 대해 논박을 하였다가 외직으로 밀려났다. 1727년(영조 3) 춘천부사(春川府使)로 나갔다가 갈리어 경기도 수원(水原) 서호(西湖)에 우거(寓居)하였다. 1728년(영조 4) 무신역변이 일어나자 성으로 들어왔다가 난이 진압되자 다시 서호로 돌아갔다. 1729년(영조 5) 길주목사(吉州牧使)‧정선군수(旌善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문정공(文靖公) 성여완(成汝完)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통훈대부(通訓大夫) 행평택현감(行平澤縣監) 성하창(成夏昌)이고, 조부는 성초일(成楚逸)이며, 부친은 통덕랑(通德郞) 성인동(成麟童)이다. 형으로 성석령(成錫齡)‧성현령(成玄齡)이 있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으나 약골이라 공부를 할 수 없어 12세에 비로소 공부를 시작하여 1년 만에 『사기(史記)』를 떼었다. 이후 틈날 때마다 『춘추호전(春秋胡傳)』과 『역학계몽(易學啓蒙)』 등의 책을 종일토록 즐겨 읽었으며, 18∼19세에 이미 천여 권의 책을 읽었다.
1699년(숙종 25) 모친상을 당하고, 1705년(숙종 31) 부친 동지공(同知公)을 따라 서울 서대문 밖 덕파령(德坡嶺: 일명 됫박고개, 현 경기도 고양시 벽제동)으로 옮기면서 가계가 더욱 몰락하여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가난하였으나 형과 강독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 자신의 호를 ‘나옹(懶翁)’이라 지었다.
1711년(숙종 37) 식년시 진사 2등 8위로 합격하고, 1713년(숙종 39) 증광시 병과 22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호서(湖西: 현 충청도)에 갔을 때, 충청남도 아산군 외암(巍巖)에 거처하고 있던 이간(李柬)과 윤혼(尹焜)을 찾아가 태극(太極)과 인물성미발성(人物性未發性) 등에 대한 설을 토론하였으며, 집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편지를 왕래하며 격론하였다. 1716년(숙종 42) 겨울 충청남도 공주 이인역(利仁驛) 독우(督郵)로 나갔으나 작은 실수로 인해 1717년(숙종 43) 봄에 파직되어 집으로 돌아올 때에도 책만 챙겨서 돌아왔다.
1717년(숙종 43)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오르고, 1718년(숙종 44)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옮겼다. 1726년(영조 2) 민상진(閔相鎭)이 멀어서 역적을 토벌할 수 없었다며 낸 사직상소에 대해 논박을 하였다가 외직으로 밀려났다. 1727년(영조 3) 춘천부사(春川府使)로 나갔다가 갈리어 경기도 수원(水原) 서호(西湖)에 우거(寓居)하였다. 1728년(영조 4) 무신역변이 일어나자 성으로 들어왔다가 난이 진압되자 다시 서호로 돌아갔다. 1729년(영조 5) 길주목사(吉州牧使)‧정선군수(旌善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屛溪集
[집필자]
박경이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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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3 | 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