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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두(李山斗)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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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앙(子仰)
호(號)나졸재(懶拙齋)
시호(諡號)청헌(淸憲)
생년1680(숙종 6)
졸년1772(영조 48)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의(全義)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필(李泌)
조부이명길(李鳴吉)
외조부안칭(安偁)

[상세내용]

이산두(李山斗)
1680년(숙종 6)∼1772년(영조 4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자앙(子仰), 호는 나졸재(懶拙齋). 이명길(李鳴吉)의 손자로, 이필(李泌)의 아들이며, 모친은 안칭(安偁)의 딸이다.

1714년(숙종 40)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732년(영조 8)에 유생으로 강경거수(講經居首)가 되어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혜를 받았다.

이듬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1758년에 판결사를 역임하였다.

그뒤 1767년에는 참판에서 지중추부사로 추천을 받아 이듬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일찍이, 시위(試闈)에 들어가 강(講)을 하였는데 한 자를 잘못 읽었음을 깨닫고 강이 끝나면서 이 사실을 실토하자, 대관이 놀라면서 남이 알지 못하는데 스스로 밝히려 하느냐고 하였다.

그는 남이 비록 알지 못한다고 하여 나 자신을 속이고 하늘을 속이겠는가라고 하여 듣는 이들이 경탄하였다. 남포군수(藍浦郡守)로 천거되어 외직으로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에는 겨우 초옥 몇 칸만 남게 되었는데, 남들은 그가 새로 관직을 떠난 것을 알지 못하였다.

기로소에 들어갔을 때 영조는 그를 자주 볼 수 없음을 안타까이 여겨 공인에게 그의 도상(圖像)을 그려 오라 하고, 원손에게 ‘九十歲像’이라는 네 글자를 쓰게 하였다. 시호는 청헌(淸憲)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國朝榜目
嶺南人物考
淸選考

[집필자]

김해영(金海榮)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