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필기(朴弼琦)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C15D544AE30B1677X0 |
자(字) | 치규(稚圭) |
호(號) | 무취옹(無臭翁) |
생년 | 1677(숙종 3) |
졸년 | 1757(영조 33)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반남(潘南) |
활동분야 | 관료 > 관인 |
부 | 박태창(朴泰昌) |
[관련정보]
[상세내용]
박필기(朴弼琦)
1677년(숙종 3)∼1757년(영조 33).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치규(稚圭), 호는 무취옹(無臭翁).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에 오른 박태창(朴泰昌)의 아들이다. 1702년(숙종 28)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724년(영조 즉위) 목릉참봉(穆陵參奉)을 지낸 뒤, 1727년 증광시(增廣試)에 합격한 후, 1727년(영조 3) 지평(持平)을 시작으로 1729년 장령(掌令), 헌납(獻納), 지제교(知製校), 사간(司諫), 대사간(大司諫), 다시 사간(司諫)을 지냈고, 1730년에는 집의(執義), 이후 고성군수(高城郡守)를 지냈다. 1735년 사간, 집의를 거쳐, 1744년 교하군수를 지내고서 1746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치사(致仕)하였다. 『영조실록(英祖實錄)』에 따르면, “박필기는 성품이 본래 염아(恬雅)하여 형식(形式)을 일삼지 않았으며, 관직에 있을 때 끼친 사랑이 있었는데, 3품관(三品官)으로서 나이를 이끌어 벼슬을 사양하였으니, 국조(國朝)에서 일찍이 없었던 바이었다. 벼슬을 그만둔 뒤에 집안에만 있으면서 잣나무 열매를 먹었으므로 강건(强健)하고 병이 없어서 나이 80이 넘어서야 사망하였다.”라고 하였다.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에 오른 박태창(朴泰昌)의 아들이다. 1702년(숙종 28)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724년(영조 즉위) 목릉참봉(穆陵參奉)을 지낸 뒤, 1727년 증광시(增廣試)에 합격한 후, 1727년(영조 3) 지평(持平)을 시작으로 1729년 장령(掌令), 헌납(獻納), 지제교(知製校), 사간(司諫), 대사간(大司諫), 다시 사간(司諫)을 지냈고, 1730년에는 집의(執義), 이후 고성군수(高城郡守)를 지냈다. 1735년 사간, 집의를 거쳐, 1744년 교하군수를 지내고서 1746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치사(致仕)하였다. 『영조실록(英祖實錄)』에 따르면, “박필기는 성품이 본래 염아(恬雅)하여 형식(形式)을 일삼지 않았으며, 관직에 있을 때 끼친 사랑이 있었는데, 3품관(三品官)으로서 나이를 이끌어 벼슬을 사양하였으니, 국조(國朝)에서 일찍이 없었던 바이었다. 벼슬을 그만둔 뒤에 집안에만 있으면서 잣나무 열매를 먹었으므로 강건(强健)하고 병이 없어서 나이 80이 넘어서야 사망하였다.”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朝鮮人名辭書
朝鮮王朝實錄
朝鮮王朝實錄
[집필자]
김성수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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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31 | 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