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조(鄭錫祚)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15C11DC870B1673X0 |
자(字) | 윤경(胤卿) |
생년 | 1673(현종 14) |
졸년 | 1714(숙종 40)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동래(東萊)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상세내용]
정석조(鄭錫祚)
1673년(현종 14)∼1714년(숙종 40).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윤경(胤卿)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거주지는 한양(漢陽)이다.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예조참판(禮曹參判) 정만화(鄭萬和)이며, 조부는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 정재해(鄭載海)이다. 부친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정시선(鄭是先)의 4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 정석년(鄭錫年)‧정석범(鄭錫範)과 서제 정석현(鄭錫賢)이 있다. 부인은 수원부사(水原府使) 김유(金楺)의 딸 청풍김씨(淸風金氏)이다.
1699년(숙종 25) 증광시 진사 3등 53위로 합격한 후 정시(庭試)에 나아가려 하였으나, 과거시험장이 지나치게 어지러워져 도를 넘어서자 더 이상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 후 천거로 관직에 나아가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고산현감(高山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장례원사평을 지낼 때는 공평하고 바른 판결로 송사에 있어서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다스리기 어렵다고 소문난 고산현감 시절에는 몇 년 동안 잘 다스려 풍속이 아름다운 고을로 이름이 나게 만들었다.
풍채와 기골이 우뚝하고,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도량을 지녔다. 그러나 강직한 성품으로 평생 사람들과 교유하는 것을 즐겨하지는 않았다. 문장에도 뛰어났는데, 특히 대구(對句)로 이루어진 변려문(騈儷文)에 뛰어났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정신검(鄭愼儉)이다.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예조참판(禮曹參判) 정만화(鄭萬和)이며, 조부는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 정재해(鄭載海)이다. 부친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정시선(鄭是先)의 4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 정석년(鄭錫年)‧정석범(鄭錫範)과 서제 정석현(鄭錫賢)이 있다. 부인은 수원부사(水原府使) 김유(金楺)의 딸 청풍김씨(淸風金氏)이다.
1699년(숙종 25) 증광시 진사 3등 53위로 합격한 후 정시(庭試)에 나아가려 하였으나, 과거시험장이 지나치게 어지러워져 도를 넘어서자 더 이상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 후 천거로 관직에 나아가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고산현감(高山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장례원사평을 지낼 때는 공평하고 바른 판결로 송사에 있어서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다스리기 어렵다고 소문난 고산현감 시절에는 몇 년 동안 잘 다스려 풍속이 아름다운 고을로 이름이 나게 만들었다.
풍채와 기골이 우뚝하고,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도량을 지녔다. 그러나 강직한 성품으로 평생 사람들과 교유하는 것을 즐겨하지는 않았다. 문장에도 뛰어났는데, 특히 대구(對句)로 이루어진 변려문(騈儷文)에 뛰어났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정신검(鄭愼儉)이다.
[참고문헌]
CD-ROM 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
艮齋集
艮齋集
[집필자]
이원배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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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3 | 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