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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세보(魏世寶)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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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국미(國美)
호(號)석병(石屛)
호(號)삼족당(三足堂)
생년1669(현종 10)
졸년1707(숙종 33)
시대조선중기
본관장흥(長興)
활동분야문학 > 문인
위동식(魏東寔)
출신지전라남도 장흥부(長興府) 계춘동(桂春洞)
저서『삼족당유고(三足堂遺稿)』

[상세내용]

위세보(魏世寶)
1669년(현종 10)∼1707년(숙종 33). 조선 중기 문인‧시인‧서화가. 자는 국미(國美), 호는 석병(石屛) 또는 삼족당(三足堂)이다.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전라남도 장흥부(長興府) 계춘동(桂春洞) 출신이다.

증조부는 위덕후(魏德厚)이고, 조부는 위정렬(魏廷烈)이며, 부친은 통덕랑(通德郞) 위동식(魏東寔)이다. 외조부는 영광김씨(靈光金氏) 김진(金振)이며, 처부는 영광김씨(靈光金氏) 김정길(金鼎吉)수원백씨(水原白氏) 백명시(白命蓍)이다.

12살 때 박이태(朴以泰)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시작하였고, 15살 때는 이미 시(詩)와 부(賦), 표(表), 책(策) 등에 두루 능통하였다. 특히 시에 뛰어나 주변의 칭송을 받았다.

1707년(숙종 33) 39살 때 병을 얻어 장천재(長川齋)에서 요양하였고, 그해 겨울 당호를 삼은 삼족당으로 돌아와 운명하였다. 호 삼족당은 ‘초라한 작은 집이지만 몸을 쉴 수 있으니 족하고, 끼니를 이을 전답이 있으니 족하고, 시와 서를 접할 수 있으니 족하다’는 뜻으로, 평소 소박하고 깨끗한 그의 성품을 보여준다. 또한 시‧서‧화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가학(家學)을 이은 아들 위문덕(魏問德)은 1740년(영조 16)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또한 손자 위백규(魏伯珪)도 1765년(영조 41) 사마시 생원에 합격하여 천거로 관직에 올랐으며, 위백순(魏伯純) 역시 1798년(정조 22) 사마시 생원에 합격하여 가문의 이름을 높였다.

저서로는 문집인 『삼족당유고(三足堂遺稿)』가 전한다.

[참고문헌]

전남향토문화백과사전
삼족당유고

[집필자]

고윤수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