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종기(徐宗沂)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11CC885AE30B1663X0 |
자(字) | 노원(魯源) |
생년 | 1663(현종 4) |
졸년 | 1729(영조 5)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대구(大丘) |
활동분야 | 기타 > 처사 |
[상세내용]
서종기(徐宗沂)
1663년(현종 4)∼1729년(영조 5). 조선 중기 은사(隱士). 자는 노원(魯源)이다. 본관은 대구(大丘)이고, 출신지는 서울이다.
고조는 약봉(藥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충숙공(忠肅公) 서성(徐渻)이고, 증조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서경빈(徐景霦)이며, 조부는 통덕랑(通德郞) 서탄리(徐坦履)이다. 부친 승문원저작(承文院著作) 서문익(徐文翊)과 모친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이정(李程)의 딸 덕수이씨(德水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충주목사(忠州牧使) 이만형(李萬亨)의 딸 광주이씨(廣州李氏)이다.
성격이 장중하여 사람들의 비웃음에 구애받지 않았고 남의 허물을 얘기하지 않았으며, 절개를 지켜 비록 궁하더라도 분수에 만족하며 원망하거나 남을 탓하는 일이 없었다. 비록 서울에 살았으나 교유를 좋아하지 않아 말을 타고 1년에도 몇 번씩 성문을 빠져 나갔다. 평소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을 정도로 공부를 하였으나 한 번도 성균관에 발길을 하지 않았고 이름을 유장(儒章)에 올리지도 않았다.
1689년(숙종 15) 증광시 진사 2등 14위로 합격하였다. 1703년(숙종 29)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제수되었고, 1705년(숙종 31)에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마친 후에는 벼슬을 사양하였다. 그 후 경기도 양근(楊根) 한여울[大灘]로 내려가서 초가집을 짓고 마당에는 오동나무와 매화나무를 심고, 방에는 책만을 두었다. 이따금 동네 친구를 따라 꽃구경을 하고 낚시질을 하며 지내다가, 1721년(경종 1) 충청북도 충주(忠州) 용대강(龍臺江)으로 옮겨 가 살았다. 때로 자식들이 벼슬길에 마음을 두면 번번이 말리면서 삼가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고 하였다.
묘는 충청북도 충주 가차면(加次面) 비조산(飛鳥山)에 있다.
고조는 약봉(藥峰)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충숙공(忠肅公) 서성(徐渻)이고, 증조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서경빈(徐景霦)이며, 조부는 통덕랑(通德郞) 서탄리(徐坦履)이다. 부친 승문원저작(承文院著作) 서문익(徐文翊)과 모친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이정(李程)의 딸 덕수이씨(德水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충주목사(忠州牧使) 이만형(李萬亨)의 딸 광주이씨(廣州李氏)이다.
성격이 장중하여 사람들의 비웃음에 구애받지 않았고 남의 허물을 얘기하지 않았으며, 절개를 지켜 비록 궁하더라도 분수에 만족하며 원망하거나 남을 탓하는 일이 없었다. 비록 서울에 살았으나 교유를 좋아하지 않아 말을 타고 1년에도 몇 번씩 성문을 빠져 나갔다. 평소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을 정도로 공부를 하였으나 한 번도 성균관에 발길을 하지 않았고 이름을 유장(儒章)에 올리지도 않았다.
1689년(숙종 15) 증광시 진사 2등 14위로 합격하였다. 1703년(숙종 29)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제수되었고, 1705년(숙종 31)에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마친 후에는 벼슬을 사양하였다. 그 후 경기도 양근(楊根) 한여울[大灘]로 내려가서 초가집을 짓고 마당에는 오동나무와 매화나무를 심고, 방에는 책만을 두었다. 이따금 동네 친구를 따라 꽃구경을 하고 낚시질을 하며 지내다가, 1721년(경종 1) 충청북도 충주(忠州) 용대강(龍臺江)으로 옮겨 가 살았다. 때로 자식들이 벼슬길에 마음을 두면 번번이 말리면서 삼가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고 하였다.
묘는 충청북도 충주 가차면(加次面) 비조산(飛鳥山)에 있다.
[참고문헌]
西堂私載
[집필자]
박경이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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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3 | 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2011-01-04 | 사마방목과 大丘徐氏世譜(2003년 간행)를 참고하여 본관을 달성(達城)에서 대구(大丘)로 수정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