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구(朴泰耉)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C15D0DCAD6CB1659X0 |
이명(異名) | 박태구(朴台耉) |
자(字) | 삼로(三老) |
호(號) | 용암(龍庵) |
생년 | 1659(효종 10) |
졸년 | 1710(숙종 36)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밀양(密陽) |
활동분야 | 기타 > 처사 |

부 | 박세정(朴世𤦹) |
조부 | 박욱(朴彧) |
처 | 함평이씨(咸平李氏) |
처부 | 김우량(金友亮) |
저서 | 『용암유고(龍庵遺稿)』 |

[상세내용]
박태구(朴泰耉)
1659년(효종 10)∼1710년(숙종 36). 본관은 밀양(密陽), 다른 이름은 박태구(朴台耉). 자는 삼로(三老), 호는 용암(龍庵).
조부는 생원(生員) 박욱(朴彧)이고, 부친은 처사(處士) 박세정(朴世𤦹)이며, 처부는 김우량(金友亮)이다. 여섯 살 때 자학(字學)을 공부하였고, 아홉 살 때 눈(雪)에 대해 구(句)를 지으라는 명에 바로 “상제께서 돌아가셨는가? 산천이 소복을 입었구나![上帝崩耶 山川素服]”라고 하여 주변을 놀라게 했다. 열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상례(喪禮)를 집행함이 예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어머니가 병환으로 고생할 때에는 방문 밖에서 안의 기후를 살피며 그때그때 알맞게 처신을 하였다. 여든 살의 나이로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슬퍼함이 지나쳐 병이 들었다. 가산은 다소 넉넉하였으나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을 좋아해, 어머니 상에 들어온 부조도 따로 두었다가 나누어 주었다. 그로 인해 후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17세에 장성(長城)의 황룡리(黃龍里)로 이사하여 외숙부 김여석(金汝錫)에게 수학하였다. 약관의 나이에 이미 배움이 깊었고, 갓 서른 살이 넘어 창계(滄溪) 임영(林泳)의 문인이 되어 학문이 더욱 깊어졌다. 명재(明齋) 윤증(尹拯)을 뵈자, 윤증이 “이 사람의 명성을 들은 지 오래다. 상대할수록 나도 모르게 공경심이 나는구나.” 하였다. 여러 번 천거를 받아 1710년(숙종 36)에 능참봉[齋郞]의 망단자에 올랐으나 제수되지는 못하였다. 이 해에 병이 들어 사망하였다. 함평이씨(咸平李氏)와의 사이에 박준(朴濬)을 두었고, 측실에게서 박렴(朴濂)‧박관(朴灌)을 두었다. 저서로 『용암유고(龍庵遺稿)』가 있다.
조부는 생원(生員) 박욱(朴彧)이고, 부친은 처사(處士) 박세정(朴世𤦹)이며, 처부는 김우량(金友亮)이다. 여섯 살 때 자학(字學)을 공부하였고, 아홉 살 때 눈(雪)에 대해 구(句)를 지으라는 명에 바로 “상제께서 돌아가셨는가? 산천이 소복을 입었구나![上帝崩耶 山川素服]”라고 하여 주변을 놀라게 했다. 열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상례(喪禮)를 집행함이 예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어머니가 병환으로 고생할 때에는 방문 밖에서 안의 기후를 살피며 그때그때 알맞게 처신을 하였다. 여든 살의 나이로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슬퍼함이 지나쳐 병이 들었다. 가산은 다소 넉넉하였으나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을 좋아해, 어머니 상에 들어온 부조도 따로 두었다가 나누어 주었다. 그로 인해 후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17세에 장성(長城)의 황룡리(黃龍里)로 이사하여 외숙부 김여석(金汝錫)에게 수학하였다. 약관의 나이에 이미 배움이 깊었고, 갓 서른 살이 넘어 창계(滄溪) 임영(林泳)의 문인이 되어 학문이 더욱 깊어졌다. 명재(明齋) 윤증(尹拯)을 뵈자, 윤증이 “이 사람의 명성을 들은 지 오래다. 상대할수록 나도 모르게 공경심이 나는구나.” 하였다. 여러 번 천거를 받아 1710년(숙종 36)에 능참봉[齋郞]의 망단자에 올랐으나 제수되지는 못하였다. 이 해에 병이 들어 사망하였다. 함평이씨(咸平李氏)와의 사이에 박준(朴濬)을 두었고, 측실에게서 박렴(朴濂)‧박관(朴灌)을 두었다. 저서로 『용암유고(龍庵遺稿)』가 있다.
[참고문헌]
德村集「龍庵處士朴公墓誌銘」
朝鮮人名辭書
朝鮮人名辭書
[집필자]
박경이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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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31 | 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