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명(尹重明)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24C911BA85B1657X0 |
자(字) | 계휘(繼輝) |
생년 | 1657(효종 8) |
졸년 | 1716(숙종 42)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해평(海平)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상세내용]
윤중명(尹重明)
1657년(효종 8)∼1716년(숙종 42). 조선 중기 문신. 자는 계휘(繼輝)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증조부는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정효공(貞孝公) 윤이지(尹履之)이고, 조부는 광흥창수(廣興倉守) 윤기(尹垍)이며, 부친은 통덕랑(通德郞) 윤세홍(尹世弘)이다. 외조부는 파주목사(坡州牧使)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한산이씨(韓山李氏) 이휘조(李徽祚)이고, 처부는 함평이씨(咸平李氏) 이욱(李煜)이다. 형제로 형 윤계명(尹啓明)과 동생 윤익명(尹翊明)이 있다.
타고난 성품이 너그럽고 온화하여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10세에 부친상을 당하자 어리고 약한 것을 걱정하며 조부는 집에서 공부를 시키려 하지 않았다. 이에 모친에게 울면서 “다른 사람들은 부친이 계셔 가르침을 받는데 자신은 그럴 수가 없으니, 앞으로 어떻게 사람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서당에 나아가서도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고 자력으로 공부하면서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때 어가가 집 앞을 지남에 다른 아이들은 나가 구경하는데 혼자 나가지 않자 모친이 물으니 “상복을 입은 몸으로 다른 사람과 똑같이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약관의 나이에 여러 번 과거시험을 보았으며, 1689년(숙종 15) 중전 인형왕후가 사저로 쫓겨난 이후 과거시험을 보지 않다가, 1705년(숙종 31) 증광시 진사 3등 49위로 합격하였다. 1712년(숙종 38) 이조판서가 관직에 추천한 사람이 예닐곱 명이었는데, 추천된 사람 중에 한 명으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된 후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내자직장(內資直長) 등을 역임하였다.
묘는 경기도 장단(長湍) 오음리(梧陰里)에 있다.
증조부는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정효공(貞孝公) 윤이지(尹履之)이고, 조부는 광흥창수(廣興倉守) 윤기(尹垍)이며, 부친은 통덕랑(通德郞) 윤세홍(尹世弘)이다. 외조부는 파주목사(坡州牧使)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한산이씨(韓山李氏) 이휘조(李徽祚)이고, 처부는 함평이씨(咸平李氏) 이욱(李煜)이다. 형제로 형 윤계명(尹啓明)과 동생 윤익명(尹翊明)이 있다.
타고난 성품이 너그럽고 온화하여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10세에 부친상을 당하자 어리고 약한 것을 걱정하며 조부는 집에서 공부를 시키려 하지 않았다. 이에 모친에게 울면서 “다른 사람들은 부친이 계셔 가르침을 받는데 자신은 그럴 수가 없으니, 앞으로 어떻게 사람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서당에 나아가서도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고 자력으로 공부하면서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때 어가가 집 앞을 지남에 다른 아이들은 나가 구경하는데 혼자 나가지 않자 모친이 물으니 “상복을 입은 몸으로 다른 사람과 똑같이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약관의 나이에 여러 번 과거시험을 보았으며, 1689년(숙종 15) 중전 인형왕후가 사저로 쫓겨난 이후 과거시험을 보지 않다가, 1705년(숙종 31) 증광시 진사 3등 49위로 합격하였다. 1712년(숙종 38) 이조판서가 관직에 추천한 사람이 예닐곱 명이었는데, 추천된 사람 중에 한 명으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된 후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내자직장(內資直長) 등을 역임하였다.
묘는 경기도 장단(長湍) 오음리(梧陰里)에 있다.
[참고문헌]
樗村遺稿
[집필자]
박경이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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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3 | 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