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경(尹趾慶)
[요약정보]
| UCI | G002+AKS-KHF_13C724C9C0ACBDB1652X0 |
| 자(字) | 계린(季麟) |
| 생년 | 1652(효종 3) |
| 졸년 | 1723(경종 3) |
| 시대 | 조선중기 |
| 본관 | 파평(坡平) |
| 활동분야 | 관료 |


[상세내용]
윤지경(尹趾慶)
1652년(효종 3)∼1723년(경종 3). 조선 중기 관료. 자는 계린(季麟)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증조부는 호조좌랑(戶曹佐郞)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윤엄(尹儼)이고, 조부는 공조참의(工曹參議) 증좌참찬(贈左參贊) 윤민헌(尹民獻)이며, 부친은 이조판서(吏曹判書) 증의정부영의정(贈議政府領議政) 윤강(尹絳)이다. 외조부는 지사(知事) 정광성(鄭廣成)과 유익(柳杙)이다. 형제로 형 윤지미(尹趾美)‧윤지완(尹趾完)과 동생 윤지인(尹趾仁) 및 서제 윤지희(尹趾禧)가 있다. 부인은 예조참판(禮曹參判) 유지발(柳之發)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선량하여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였으나 약관이 채 되기도 전에 부친과 모친을 차례로 잃었다. 이후 형들의 엄격한 가르침에 따라 공부하여 1687년(숙종 13) 식년시 생원 3등 65위로 합격하였다. 1689년(숙종 15) 전설별제(典設別檢)에 제수되었으나 중궁의 폐위를 이유로 나아가지 않았고, 1694년(숙종 20) 사포별검(司圃別檢)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95년(숙종 21) 금정찰방(金井察訪)에 제수된 후 임기가 만료되어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에 올랐다가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 옮겨 갔다. 1699년(숙종 25) 태인현감(泰仁縣監), 1701년(숙종 27) 호조좌랑(戶曹佐郞)‧호조정랑(戶曹正郞)‧우수운판관(右水運判官), 1702년(숙종 28) 예천군수(醴泉郡守)를 거쳐 인천부사(仁川府使)로 승진하였다. 1706년(숙종 32) 평양서윤(平壤庶尹)이 되었으나, 1708년(숙종 34) 동생 윤지인이 평안도안렴사로 나오는 바람에 갈려서 돌아와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에 제수되었다. 이해 광주목사(黃州牧使)로 나아갔고, 1710년(숙종 36) 공조좌랑(工曹正郞)에 제수된 후 안성군수(安城郡守)‧성천부사(成川府使)를 지냈다. 1714년(숙종 40) 갈려서 돌아와 익위사익위(翊衛司翊衛)에 제수되었으며, 바로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에 배직되었다. 1715년(숙종 41) 삼척부사(三陟府使)에 제수되었고, 1721년(경종 1) 만 70세의 나이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가자(加資)되어었으며, 오위장(五衛將)에 제수되었다.
묘는 경기도 수원(水原)에 있다.
증조부는 호조좌랑(戶曹佐郞)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윤엄(尹儼)이고, 조부는 공조참의(工曹參議) 증좌참찬(贈左參贊) 윤민헌(尹民獻)이며, 부친은 이조판서(吏曹判書) 증의정부영의정(贈議政府領議政) 윤강(尹絳)이다. 외조부는 지사(知事) 정광성(鄭廣成)과 유익(柳杙)이다. 형제로 형 윤지미(尹趾美)‧윤지완(尹趾完)과 동생 윤지인(尹趾仁) 및 서제 윤지희(尹趾禧)가 있다. 부인은 예조참판(禮曹參判) 유지발(柳之發)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선량하여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였으나 약관이 채 되기도 전에 부친과 모친을 차례로 잃었다. 이후 형들의 엄격한 가르침에 따라 공부하여 1687년(숙종 13) 식년시 생원 3등 65위로 합격하였다. 1689년(숙종 15) 전설별제(典設別檢)에 제수되었으나 중궁의 폐위를 이유로 나아가지 않았고, 1694년(숙종 20) 사포별검(司圃別檢)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95년(숙종 21) 금정찰방(金井察訪)에 제수된 후 임기가 만료되어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에 올랐다가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 옮겨 갔다. 1699년(숙종 25) 태인현감(泰仁縣監), 1701년(숙종 27) 호조좌랑(戶曹佐郞)‧호조정랑(戶曹正郞)‧우수운판관(右水運判官), 1702년(숙종 28) 예천군수(醴泉郡守)를 거쳐 인천부사(仁川府使)로 승진하였다. 1706년(숙종 32) 평양서윤(平壤庶尹)이 되었으나, 1708년(숙종 34) 동생 윤지인이 평안도안렴사로 나오는 바람에 갈려서 돌아와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에 제수되었다. 이해 광주목사(黃州牧使)로 나아갔고, 1710년(숙종 36) 공조좌랑(工曹正郞)에 제수된 후 안성군수(安城郡守)‧성천부사(成川府使)를 지냈다. 1714년(숙종 40) 갈려서 돌아와 익위사익위(翊衛司翊衛)에 제수되었으며, 바로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에 배직되었다. 1715년(숙종 41) 삼척부사(三陟府使)에 제수되었고, 1721년(경종 1) 만 70세의 나이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가자(加資)되어었으며, 오위장(五衛將)에 제수되었다.
묘는 경기도 수원(水原)에 있다.
[참고문헌]
樗村遺稿
[집필자]
박경이
| 수정일 | 수정내역 |
|---|---|
| 2010-10-23 | 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