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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기(成碩夔)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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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일(仲一)
호(號)만오당(晩悟堂)
생년1645(인조 23)
졸년1715(숙종 41)
시대조선중기
본관창녕(昌寧)
활동분야문신
성만창(成萬昌)

[상세내용]

성석기(成碩夔)
1645년(인조 23)~1715년(숙종 41).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중일(仲一)이고, 호는 만오당(晩悟堂)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거주지는 한양이다.

증조부는 성중길(成仲吉)이고, 조부는 성시량(成時亮)이며, 부친은 봉렬대부(奉列大夫) 전행후릉참봉(前行厚陵參奉) 성만창(成萬昌)이다. 외조부는 박안제(朴安悌)이고, 처부는 신재(申在)이다. 형은 성석방(成碩芳)‧성석신(成碩藎)이고, 동생은 성석명(成碩蓂)이다.

1683년(숙종 9) 증광시 진사 3등 26위로 합격하였고, 1684년(숙종 10) 식년시 문과에 병과 8위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필선(弼善)‧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양양부사(襄陽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1705년(숙종 31) 장령으로 재직 중, 삼대신(三臺臣)을 체직(遞職)시켰다가 비난이 커지자 장령 김두남(金斗南)과 함께 책임을 지고 관직에서 물러나 대기하고 있었는데, 곧 다시 임용되었다. 그러나 관직에 나와서 삼대신의 체직시키는 명을 거둬달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임금으로부터 일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삼대신을 다시 관직에 나오도록 청한다며 나무람을 받자 다시 물러나 있다가 재차 임용되었다.

1708년(숙종 34) 양양부사 시절 강원도암행어사(江原道暗行御史) 심수현(沈壽賢)으로부터 선정(善政)을 베푼 사실이 보고되었다. 그러나 1712년(숙종 38) 양양에서 올린 논계(論啓) 가운데 유혁연(柳赫然)을 비롯하여 이만성(李萬成)과 이원정(李元禎)과 관련된 일이 의견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책임을 지고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자 체차(遞差)되었다.

[참고문헌]

CD-ROM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肅宗實錄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