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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중하(梁重廈)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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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대재(大材)
생년1641(인조 19)
졸년1718(숙종 44)
시대조선중기
본관남원(南原)
활동분야문신 > 문신

[상세내용]

양중하(梁重廈)
1641년(인조 19)∼1718년(숙종 44) 2월 24일. 조선 중기 문신. 자는 대재(大材)이다.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출신지는 서울이다.

증조부는 양황(梁榥)이고, 조부는 양경갑(梁熲甲)이다. 부친 양석구(梁錫九)와 모친 어한명(魚漢明)의 딸 함종어씨(咸從魚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째 부인은 김응해(金應海)의 딸 경주김씨(慶州金氏)이고, 둘째 부인은 경상룡(慶翔龍)의 딸 청주경씨(淸州慶氏)이다.

1675년(숙종 1) 식년시 생원 3등 52위로 합격하였다. 1678년(숙종 4) 증광시 병과 7위로 급제한 후에 박사(博士) 겸 봉상시직장(兼奉常寺直長)에 올라 선조실록(宣祖實錄)을 수정하고 개정하는 일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병조좌랑(兵曹佐郞)‧예조좌랑(禮曹佐郞) 등을 거쳐 1685년(숙종 11)에 이르기까지 지평(持平)‧정언(正言)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숙종 15) 서인이 실각하고 인현왕후가 폐위되는 등 나라에 변고가 생기자 물러나 오랫동안 세상사를 잊고 지냈다.

1695년(숙종 21)부터 1712년(숙종 38)까지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안주목사(安州牧使)‧양양부사(襄陽府使)‧종성부사(鍾城府使)‧호조참판(戶曹參判)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향년 7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슬하에 5남을 두었는데, 양성규(梁聖揆)‧양도규(梁道揆)‧양서규(梁敍揆)‧양일규(梁一揆)‧양문규(梁文揆)이다.

묘는 경기도 양주(楊州)에 있다.

[참고문헌]

西堂私載
司馬榜目

[집필자]

김경희
수정일수정내역
2010-10-23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