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겸(李山謙)
[상세내용]
이산겸(李山謙)
생졸년 미상. 조선 중기 의병.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보령(保寧)에 거주하는 서얼 출신으로서 의병장 조헌(趙憲)의 부하로 들어갔다. 조헌이 사망한 뒤 휘하의 병사들을 모아 평택(平澤)과 진위(振威) 사이에서 주둔하였고, 이후 건의대장(建義大將) 심수경(沈守慶)의 통제를 받았다. 그 후 부대를 해산한 뒤 김덕령(金德齡)의 휘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1594년(선조 27) 비변사(備邊司)의 보고를 받은 왕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 이는 임진왜란이 계속되면서 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서 충청도 지방에서 백성과 병졸들을 포섭하여 민란을 일으킨 송유진(宋儒眞)을 친국(親鞫)했을 때 이산겸(李山謙)을 지목하여 민란을 주도한 인물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국문(鞠問) 과정에서 그의 지인들 모두가 역모한 사실이 없었다고 진술하였다. 계속하여 형신(刑訊)을 당하였지만 반역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결국 몸이 심하게 망가진 뒤에야 하옥(下獄)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보령(保寧)에 거주하는 서얼 출신으로서 의병장 조헌(趙憲)의 부하로 들어갔다. 조헌이 사망한 뒤 휘하의 병사들을 모아 평택(平澤)과 진위(振威) 사이에서 주둔하였고, 이후 건의대장(建義大將) 심수경(沈守慶)의 통제를 받았다. 그 후 부대를 해산한 뒤 김덕령(金德齡)의 휘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1594년(선조 27) 비변사(備邊司)의 보고를 받은 왕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 이는 임진왜란이 계속되면서 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서 충청도 지방에서 백성과 병졸들을 포섭하여 민란을 일으킨 송유진(宋儒眞)을 친국(親鞫)했을 때 이산겸(李山謙)을 지목하여 민란을 주도한 인물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국문(鞠問) 과정에서 그의 지인들 모두가 역모한 사실이 없었다고 진술하였다. 계속하여 형신(刑訊)을 당하였지만 반역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결국 몸이 심하게 망가진 뒤에야 하옥(下獄)되었다.
[참고문헌]
[집필자]
유치석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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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