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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술(辛宗述)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2E0C885C220U9999X0
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영산(靈山)
활동분야무신
신현(申鉉)

[상세내용]

신종술(辛宗述)
생졸년 미상. 조선 중기 무신. 본관은 영산(靈山)이다.

부친은 판관(判官) 신현(申鉉)이다. 형은 봉렬대부(奉列大夫) 연기(燕岐) 행현감(行縣監) 신종적(申宗迪)‧통덕랑(通德郞) 신종괄(申宗适)이고, 동생은 신종형(申宗逈)이다.

관직은 내승(內丞)‧월곶첨사(月串僉使)‧호군(護軍)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즉위년인 1608년(선조 41)에 월곶첨사를 역임하고 있었는데, 사헌부(司憲府)에서 성품이 흉악하여 무뢰배들을 모아서 폐를 끼치므로 파직할 것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이틀 후 파직 대신 훗날 공을 세우도록 하라는 교지를 내렸으나, 승정원(承政院)에서 부당함을 재차 역설하여 명을 거두었다. 1610년(광해군 2)에 궁을 중건하는데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가자(加資)되었다. 이에 사헌부에서 총애를 받고 있는 폐희신씨(嬖姬辛氏)의 오빠로서 권력을 등에 업고 첨사에 오른 것만 해도 외람되는 일이며 또한, 재직 당시 불성실한 행동이 드러나 물의를 빚었으므로 임금의 결정을 거두어 주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장령(掌令) 민유경(閔有慶)과 사헌부에서 또 여러 차례 청하였으나, 마찬가지로 윤허하지 않았다. 1613년(광해군 5)에 논학(論鶴)과 창기를 두고 싸운 적이 있었는데, 원한을 품고 끌어들여 왕의 친국을 받았다. 이 일로 의금부(義禁府)에서 삭직시킬 것을 청하자 대신들과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명하였다. 결국 7월에 먼 곳으로 유배처분을 받았다. 1631년(인조 9)에 내승 관직에 특배(特拜)되자, 사헌부에서 그에게 능력이 없으니 직첩을 환수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슬하에 5남을 두었는데, 신필영(申必榮)‧신기영申(起榮)‧신세영(申世榮)‧신자영(申自榮)‧신태영(申泰榮)이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正草本)仁祖實錄

[집필자]

이후남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