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보(徐山甫)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11CC0B0BCF4U9999X0 |
자(字) | 주경(周卿) |
생년 | ?(미상)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이천(利川) |
활동분야 | 문신 |
부 | 서강(徐崗) |
[관련정보]
[상세내용]
서산보(徐山甫)
생졸년 미상.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주경(周卿)이다. 본관은 이천(利川)이고, 거주지는 한양이다.
증조부는 서진(徐晉)이고, 조부는 서혼(徐混)이며, 부친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서강(徐崗)이다. 외조부는 이연손(李延孫)이다.
1480년(성종 11) 식년시 생원 3등 44위로 합격하였으며, 1486년(성종 17) 식년시 문과에 병과 17위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김제군수(金堤郡守)‧김포현령(金浦縣令) 등을 역임하였으며, 품계는 분순부위(奮順副尉)에 이르렀다.
1496년(연산군 2) 장령 재임 시절에 대사헌(大司憲) 이집(李諿)‧대사간(大司諫) 이인형(李仁亨) 등과 함께 임금이 정사(政事)를 하는데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였다는 서계(書啓)를 올리고 사직하였다. 같은 해에 정언(正言) 권균(權鈞)과 함께 윤탕로(尹湯老)의 일을 의논하며 외척(外戚)을 보전하기 위해 법의 원칙을 지킬 것과 외척들에게 궁궐에 자주 드나들지 않도록 5일에 한 번씩만 문안을 받을 것 등을 임금에게 간언하였다. 또한,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모시는 것 등에 대해 불가함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497년(연산군 3) 김제군수 시절 모친의 나이가 70세에 다다름을 이유로 모친과 가까운 곳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청하여 모친과 가까운 곳의 관직에 제수되었다. 그러자 지평(持平) 강숙돌(姜叔突)이 서산보(徐山甫)의 모친은 70세가 아닌, 65세로 그의 요청을 받아준 것은 잘못이라며 다시 원래 관직으로 복귀하도록 해줄 것을 청하였지만 그의 효심을 높이 산 임금의 은혜로 무사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에 반대하다 부자(父子)가 함께 처형을 당한 강형(姜詗)의 입에 그의 이름이 오르게 되었고, 결국 강형과 같은 무리로 지목되어 이미 죽은 몸으로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증조부는 서진(徐晉)이고, 조부는 서혼(徐混)이며, 부친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서강(徐崗)이다. 외조부는 이연손(李延孫)이다.
1480년(성종 11) 식년시 생원 3등 44위로 합격하였으며, 1486년(성종 17) 식년시 문과에 병과 17위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김제군수(金堤郡守)‧김포현령(金浦縣令) 등을 역임하였으며, 품계는 분순부위(奮順副尉)에 이르렀다.
1496년(연산군 2) 장령 재임 시절에 대사헌(大司憲) 이집(李諿)‧대사간(大司諫) 이인형(李仁亨) 등과 함께 임금이 정사(政事)를 하는데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였다는 서계(書啓)를 올리고 사직하였다. 같은 해에 정언(正言) 권균(權鈞)과 함께 윤탕로(尹湯老)의 일을 의논하며 외척(外戚)을 보전하기 위해 법의 원칙을 지킬 것과 외척들에게 궁궐에 자주 드나들지 않도록 5일에 한 번씩만 문안을 받을 것 등을 임금에게 간언하였다. 또한,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모시는 것 등에 대해 불가함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497년(연산군 3) 김제군수 시절 모친의 나이가 70세에 다다름을 이유로 모친과 가까운 곳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청하여 모친과 가까운 곳의 관직에 제수되었다. 그러자 지평(持平) 강숙돌(姜叔突)이 서산보(徐山甫)의 모친은 70세가 아닌, 65세로 그의 요청을 받아준 것은 잘못이라며 다시 원래 관직으로 복귀하도록 해줄 것을 청하였지만 그의 효심을 높이 산 임금의 은혜로 무사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에 반대하다 부자(父子)가 함께 처형을 당한 강형(姜詗)의 입에 그의 이름이 오르게 되었고, 결국 강형과 같은 무리로 지목되어 이미 죽은 몸으로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참고문헌]
CD-ROM 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燕山君日記
國朝文科榜目
燕山君日記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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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