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공휘(金公輝)
[요약정보]
| UCI | G002+AKS-KHF_13AE40ACF5D718B1550X0 |
| 자(字) | 경명(景明) |
| 생년 | 1550(명종 5) |
| 졸년 | 1615(광해군 7) |
| 시대 | 조선중기 |
| 본관 | 광산(光山) |
| 활동분야 | 관리 |

| 부 | 김호(金鎬) |

[상세내용]
김공휘(金公輝)
1550년(명종 5)~1615년(광해군 7)(주1)
. 조선 중기 관리. 자는 경명(景明)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좌의정(左議政) 김국광(金國光)의 후손으로, 부친 현감(縣監) 김호(金鎬)와 모친 공조정랑(工曹正郞) 이광원(李光元)의 딸 전의이씨(全義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형은 김계휘(金桂輝)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1년(선조 24) 이산현감(尼山縣監)으로 재직 중, 정철(鄭澈)이 광해군을 책봉하도록 선조에게 건의하였다가 신성군(信城君)을 총애하고 있었던 임금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유배된 사건이 있었는데 이때 정철과 친분이 있었던 점을 사헌부(司憲府)에서 지적하여 김공휘(金公輝)의 파직을 건의하였고 결국 건의가 받아들여져서 해당 관직에서 물러났다. 1604년(선조 37)에 임천군수(林川郡守)에 임명되었다. 이후 파주목사(坡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1611년(광해군 3)에는 옥천군수(沃川郡守)로 재직 중이었는데, 무뢰한들을 데려다가 중방(中房)으로 삼고 부역 등의 일을 그들에게 맡게 하여 백성이 피해를 입었다며 사헌부가 탄핵하였다. 그 결과 해당 관직에서 파직되었다. 1612년(광해군 4)에 임금의 특별 명령으로 자급(資級)을 올려 받았다. 이때 사헌부에서 특별한 공적이 없이 자급을 올려주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고 지적하며 취소를 건의하였으나 취소되지 않았으며, 이후에도 대신(大臣)들이 승급 취소를 건의하였지만,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생졸년 |
| 『신독재유고(愼獨齋遺稿)』(1710) 권8, [파주목사 김공묘갈명(坡州牧使金公墓碣銘)] |
좌의정(左議政) 김국광(金國光)의 후손으로, 부친 현감(縣監) 김호(金鎬)와 모친 공조정랑(工曹正郞) 이광원(李光元)의 딸 전의이씨(全義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형은 김계휘(金桂輝)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1년(선조 24) 이산현감(尼山縣監)으로 재직 중, 정철(鄭澈)이 광해군을 책봉하도록 선조에게 건의하였다가 신성군(信城君)을 총애하고 있었던 임금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유배된 사건이 있었는데 이때 정철과 친분이 있었던 점을 사헌부(司憲府)에서 지적하여 김공휘(金公輝)의 파직을 건의하였고 결국 건의가 받아들여져서 해당 관직에서 물러났다. 1604년(선조 37)에 임천군수(林川郡守)에 임명되었다. 이후 파주목사(坡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1611년(광해군 3)에는 옥천군수(沃川郡守)로 재직 중이었는데, 무뢰한들을 데려다가 중방(中房)으로 삼고 부역 등의 일을 그들에게 맡게 하여 백성이 피해를 입었다며 사헌부가 탄핵하였다. 그 결과 해당 관직에서 파직되었다. 1612년(광해군 4)에 임금의 특별 명령으로 자급(資級)을 올려 받았다. 이때 사헌부에서 특별한 공적이 없이 자급을 올려주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고 지적하며 취소를 건의하였으나 취소되지 않았으며, 이후에도 대신(大臣)들이 승급 취소를 건의하였지만,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참고문헌]
[집필자]
정병섭
| 수정일 | 수정내역 |
|---|---|
| 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