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언수(崔彦粹)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D5CC5B8C218U9999X0 |
자(字) | 사순(士純) |
호(號) | 삼계(三溪) |
생년 | ?(미상)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삭녕(朔寧)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최준원(崔濬源) |
조부 | 최수웅(崔秀雄) |
증조부 | 최영린(崔永潾) |
5대조 | 최항(崔恒) |
처부 | 민염(閔恬) |
출신지 | 전라북도 남원(南原) |
[관련정보]
[상세내용]
최언수(崔彦粹)
생졸년 미상.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사순(士純)이고 호는 삼계(三溪)이다. 본관은 삭녕(朔寧)이고, 출신지는 전라북도 남원(南原)이다.
최항(崔恒)의 후손이며 증조부는 최영린(崔永潾), 조부는 최수웅(崔秀雄), 부친은 성균관생원(成均館生員) 최준원(崔濬源)이다. 처부는 민염(閔恬)이다.
1528년(중종 23)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2등 23위로 합격하였고, 1537년(중종 32) 정유(丁酉) 별시(別試) 병과(丙科) 4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1549년(명종 4) 예문관대교(藝文館待敎)을 거쳐, 이듬해 예문관 봉교, 사간원 정언(正言) 등을 역임하였다. 사간원 정언 재임 시, 구수담.송순.허자.이준경 등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기기도 하였다.
윤원형(尹元衡)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남원으로 돌아가 시서(詩書)를 벗삼아 여생을 마쳤다. 평소 하서(河西) 김인후(金仁厚),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과 도의(道義)로써 교제하였다.전라남도 구례군(求禮郡) 용방면(龍方面)에 있는 방산서원(方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최항(崔恒)의 후손이며 증조부는 최영린(崔永潾), 조부는 최수웅(崔秀雄), 부친은 성균관생원(成均館生員) 최준원(崔濬源)이다. 처부는 민염(閔恬)이다.
1528년(중종 23)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2등 23위로 합격하였고, 1537년(중종 32) 정유(丁酉) 별시(別試) 병과(丙科) 4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1549년(명종 4) 예문관대교(藝文館待敎)을 거쳐, 이듬해 예문관 봉교, 사간원 정언(正言) 등을 역임하였다. 사간원 정언 재임 시, 구수담.송순.허자.이준경 등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기기도 하였다.
윤원형(尹元衡)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남원으로 돌아가 시서(詩書)를 벗삼아 여생을 마쳤다. 평소 하서(河西) 김인후(金仁厚),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과 도의(道義)로써 교제하였다.전라남도 구례군(求禮郡) 용방면(龍方面)에 있는 방산서원(方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국조문과방목
명종실록
CD-ROM 사마방목
용성속지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index.jsp)
명종실록
CD-ROM 사마방목
용성속지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index.jsp)
[집필자]
전주원
대표명 | 최언수(崔彦粹) |
성명 | 최언수(崔彦粹) |
성명 : "최언수(崔彦粹)"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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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30 | 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