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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수(丁巖壽)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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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응룡(應龍)
호(號)창랑(滄浪)
생년1534(중종 29)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나주(羅州)
활동분야문학 > 문인
정진(丁晉)
출생지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 동복(同福)

[상세내용]

정암수(丁巖壽)
1534년(중종 29)(주1)
생년
본인 사마방목을 참고하여 생년을 추가함.
~졸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장가로, 자는 응룡(應龍)이고, 호는 창랑(滄浪)이다.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 동복(同福)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정진(丁晉)이다.

1561년(명종 16) 신유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 18위로 합격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중풍에 걸린 어머니를 잘 봉양하고 돌아가신 뒤에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러한 효행이 알려져 1655년(효종 6)에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고향에 창랑정(滄浪亭)을 짓고 송강(松江) 정철(鄭澈) 등 여러 문인과 교유하였다.

1589년(선조 22) 12월 박천정(朴天挺)‧박대붕(朴大鵬)‧임윤성(任尹聖)‧김승서(金承緖)‧양산룡(梁山龍)‧이경남(李慶男)‧김응회(金應會)‧유사경(柳思敬)‧유영(柳瑛) 등과 연명하여 이산해(李山海)‧정언신(鄭彦信)‧정인홍(鄭仁弘)‧유성룡(柳成龍) 등은 나라를 병들게 하는 간인(姦人)이며 역당이므로 멀리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왕에게 올렸다. 뒤에 이 무함(誣陷)하는 상소가 실은 정철(鄭澈)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소문이 정철의 문객(門客)으로 드나들던 심희수(沈喜壽)에 의해 퍼지기도 하였다. 상소를 본 선조는 연명한 사람 모두를 잡아들일 수 없으니 정암수(丁巖壽)를 포함하여 위에서 10명만을 추국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1591년(선조 24)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이 논집(論執)하고 태학생(太學生)들도 그를 탄원하는 상소를 올려 구원받았다. 그는 고향의 창랑정(滄浪亭) 앞 바위에 청정재(淸淨齋)라고 새겼는데 이는 우암 송시열이 정자의 이름을 청정재로 바꿔주었기 때문이다.

문집으로 1897년에 간행된 창랑유집(滄浪遺集) 1책이 전한다.

[참고문헌]

전라남도지

[집필자]

홍현성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