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경(申重慶)
[요약정보]
| UCI | G002+AKS-KHF_13C2E0C911ACBDU9999X0 |
| 호(號) | 금서당(琴書堂) |
| 생년 | ?(미상) |
| 졸년 | ?(미상) |
| 시대 | 조선중기 |
| 본관 | 고령(高靈) |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상세내용]
신중경(申重慶)
생졸년 미상. 본관은 고령(高靈), 호는 금서당(琴書堂).
타고난 자질이 순미(純美)하고 학문이 정심(精深)하였으며 독실(篤實)하게 실천하였다. 일찍이 혼천의(渾天儀)를 미루어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어 일영(日影)‧도분(度分)‧누각(漏刻)이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하였다. 후진을 교회(敎誨)하는 일을 맡아 학자들이 많이 따랐으며 천거(薦擧)로 교관(敎官)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으며 임진왜란 후 유학(儒學)의 진작에 힘을 다하였다. 1669년(현종 10) 향인사(鄕人祠) 학봉사우(鶴峰祠宇)를 전주(全州) 학봉산(鶴鳳山) 아래에 세우고 만암(晩庵) 이상진(李尙眞)과 합향(合享)되었다가, 뒤에 전주시 교동 발산 아래 한계서원(寒溪書院)으로 이건(移建)하였는데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타고난 자질이 순미(純美)하고 학문이 정심(精深)하였으며 독실(篤實)하게 실천하였다. 일찍이 혼천의(渾天儀)를 미루어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어 일영(日影)‧도분(度分)‧누각(漏刻)이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하였다. 후진을 교회(敎誨)하는 일을 맡아 학자들이 많이 따랐으며 천거(薦擧)로 교관(敎官)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으며 임진왜란 후 유학(儒學)의 진작에 힘을 다하였다. 1669년(현종 10) 향인사(鄕人祠) 학봉사우(鶴峰祠宇)를 전주(全州) 학봉산(鶴鳳山) 아래에 세우고 만암(晩庵) 이상진(李尙眞)과 합향(合享)되었다가, 뒤에 전주시 교동 발산 아래 한계서원(寒溪書院)으로 이건(移建)하였는데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참고문헌]
朝鮮人名辭書
完山邑誌
燃藜室記述
完山邑誌
燃藜室記述
[집필자]
김동섭
성명 : "신중경(申重慶)"에 대한 용례
| 수정일 | 수정내역 |
|---|---|
| 2008-12-31 | 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