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부(朴明榑)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C15BA85BD80B1571X0 |
자(字) | 여승(汝昇) |
호(號) | 지족당(知足堂) |
생년 | 1571(선조 4) |
졸년 | 1639(인조 17)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밀양(密陽)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박영(朴濚) |
[상세내용]
박명부(朴明榑)
1571년(선조 4)~1639년(인조 17).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여승(汝昇), 호는 지족당(知足堂).
부친은 박영(朴濚)이다. 1590년(선조 23)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관직은 예조참의(禮曹參議)와 감사(監司)를 거쳐 행좌승지(行左承旨)에 이르렀다.
1615년 사헌부에서 괴산군수(槐山郡守) 박명부(朴明榑)가 사의(邪議)를 주장하면서, 역적 정온(鄭蘊)의 시비(是非)를 밝히고 구제를 주선하겠다고 하던 말을 듣을 자들이 모두 분개하였다며, 본직에 제수된 박명부를 사판에서 삭제해 달라는 청이 올라오자 왕이 그대로 따랐다.
1637년에는 강원감사(江原監司)가 되었는데 사간원에서 박명부의 나이가 많고 성격이 옹졸하여 두루 교화를 펴는 책임자로 적합하지 않다고 하자 왕이 승낙한 일이 있었다.
부친은 박영(朴濚)이다. 1590년(선조 23)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관직은 예조참의(禮曹參議)와 감사(監司)를 거쳐 행좌승지(行左承旨)에 이르렀다.
1615년 사헌부에서 괴산군수(槐山郡守) 박명부(朴明榑)가 사의(邪議)를 주장하면서, 역적 정온(鄭蘊)의 시비(是非)를 밝히고 구제를 주선하겠다고 하던 말을 듣을 자들이 모두 분개하였다며, 본직에 제수된 박명부를 사판에서 삭제해 달라는 청이 올라오자 왕이 그대로 따랐다.
1637년에는 강원감사(江原監司)가 되었는데 사간원에서 박명부의 나이가 많고 성격이 옹졸하여 두루 교화를 펴는 책임자로 적합하지 않다고 하자 왕이 승낙한 일이 있었다.
[참고문헌]
國朝文科榜目
朝鮮王朝實錄
朝鮮人名辭書
姓號譜彙
密城朴氏世譜
朝鮮王朝實錄
朝鮮人名辭書
姓號譜彙
密城朴氏世譜
[집필자]
이은영
대표명 | 박명부(朴明榑) |
성명 | 박명부(朴明榑) |
성명 : "박명부(朴明榑)"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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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31 | 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