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진(李用晉)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6A9C9C4B1575X0 |
자(字) | 중진(仲進) |
생년 | 1575(선조 8) |
졸년 | 1624(인조 2)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관련정보]
[상세내용]
이용진(李用晉)
1575년(선조 8)∼1624년(인조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진(仲進). 이형(李詗)의 손자로, 관찰사 이성임(李聖任)의 아들이며, 모친은 이각(李恪)의 딸이다. 부인은 김민선(金敏善)의 딸이다.
1612년(광해군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정언에 재임 중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역적을 치는 것은 천하의 대법이니 왕이라도 사은(私恩)으로 용서할 수 없다 하여 영창대군을 처형할 것을 적극 주장하였다.
그뒤 1615년 병조좌랑이 되고 이어 병조정랑을 거쳐, 1621년 부승지가 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그에 대한 비난이 쏟아져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내응을 우려하여 기자헌 등 37명과 함께 처형되었다. 1627년 3월에 이원익과 이귀의 상소로 신원이 복구되었다.
1612년(광해군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정언에 재임 중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역적을 치는 것은 천하의 대법이니 왕이라도 사은(私恩)으로 용서할 수 없다 하여 영창대군을 처형할 것을 적극 주장하였다.
그뒤 1615년 병조좌랑이 되고 이어 병조정랑을 거쳐, 1621년 부승지가 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그에 대한 비난이 쏟아져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내응을 우려하여 기자헌 등 37명과 함께 처형되었다. 1627년 3월에 이원익과 이귀의 상소로 신원이 복구되었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집필자]
이재호(李載琥)
성명 : "이용진(李用晉)"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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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2011-06-07 | 문과 단회방목을 참고하여 자를 중통(仲通)에서 중진(仲進)으로 수정함. 생년 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