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원(吳瑗)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624C6D0FFFFB1700X0 |
자(字) | 백옥(伯玉) |
호(號) | 월곡(月谷) |
시호(諡號) | 문목(文穆) |
생년 | 1700(숙종 26) |
졸년 | 1740(영조 16)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해주(海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오태주(吳泰周) |
모 | 명안공주(明安公主) |
조부 | 오두인(吳斗寅) |
저서 | 『월곡집』 |

[관련정보]
[상세내용]
오원(吳瑗)
1700년(숙종 26)∼1740년(영조 1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백옥(伯玉), 호는 월곡(月谷).
오두인(吳斗寅)의 손자이며, 부친은 오태주(吳泰周)이고, 모친은 현종의 딸 명안공주(明安公主)이다. 이재(李縡)의 처질로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23년(경종 3) 사마시에 합격하고, 1728년(영조 4) 정시문과에 장원하여 문명(文名)이 높았다. 사서(司書)로 있을 때 영조에게 학문과 덕을 닦는 요령을 진언하여 가납되었고, 직언을 잘 하기로 이름이 났다.
1729년 정언으로 있으면서 탕평책을 적극 반대하다가 한때 삭직되었다.
1732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교리‧검토관‧이조좌랑‧응교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736년 참찬관(參贊官)으로 민형수(閔亨洙)를 신구(伸救)하려다가 또 파직되었으나 곧 다시 기용되어 1739년 부제학이 되고, 승지‧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일찍이 영조에게 당나라 육지(陸贄)가 주의(奏議)한 양세법(兩稅法)의 여섯가지 폐단을 진강하여 왕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고, 또 성학(聖學)의 요무(要務)를 조목을 들어 밝히고 성덕(聖德)의 문제와 시정(時政)의 장부(臧否) 등을 입론하였다.
성품은 직량(直諒), 온후(溫厚)하였으며 총명절인(聰明絶人)하고, 문장 또한 청절(淸絶)하다 하여 진정한 유신(儒臣)이라는 평을 들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월곡집』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오두인(吳斗寅)의 손자이며, 부친은 오태주(吳泰周)이고, 모친은 현종의 딸 명안공주(明安公主)이다. 이재(李縡)의 처질로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23년(경종 3) 사마시에 합격하고, 1728년(영조 4) 정시문과에 장원하여 문명(文名)이 높았다. 사서(司書)로 있을 때 영조에게 학문과 덕을 닦는 요령을 진언하여 가납되었고, 직언을 잘 하기로 이름이 났다.
1729년 정언으로 있으면서 탕평책을 적극 반대하다가 한때 삭직되었다.
1732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교리‧검토관‧이조좌랑‧응교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736년 참찬관(參贊官)으로 민형수(閔亨洙)를 신구(伸救)하려다가 또 파직되었으나 곧 다시 기용되어 1739년 부제학이 되고, 승지‧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일찍이 영조에게 당나라 육지(陸贄)가 주의(奏議)한 양세법(兩稅法)의 여섯가지 폐단을 진강하여 왕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고, 또 성학(聖學)의 요무(要務)를 조목을 들어 밝히고 성덕(聖德)의 문제와 시정(時政)의 장부(臧否) 등을 입론하였다.
성품은 직량(直諒), 온후(溫厚)하였으며 총명절인(聰明絶人)하고, 문장 또한 청절(淸絶)하다 하여 진정한 유신(儒臣)이라는 평을 들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월곡집』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國朝榜目
藥坡漫錄
號譜
國朝榜目
藥坡漫錄
號譜
[집필자]
반윤홍(潘允洪)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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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