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택하(鄭宅河)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815D0DDD558B1693X0 |
자(字) | 자중(子中) |
생년 | 1693(숙종 19) |
졸년 | 1741(영조 17)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영일(迎日)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정식(鄭湜) |
생부 | 정집(鄭濈) |

[상세내용]
정택하(鄭宅河)
1693년(숙종 19)∼1741년(영조 1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자중(子中). 정집(鄭濈)의 아들이며, 용궁현감 정식(鄭湜)에게 입양되었다.
1715년(숙종 41) 식년문과 갑과에 탐화랑(探花郞: 세번째로 급제한 사람)으로 급제하여 곧 종묘직장(宗廟直長)에 제수되고, 시강원의 설서를 거쳐 정언‧지평‧헌납에 올랐다.
경종 즉위 이후 왕세제(뒤의 영조) 책봉문제를 반대한 김일경(金一鏡)일파를 소론(疏論)하다가 도리어 노론 4대신과 함께 신임사화 때 파직되었다.
영조가 즉위하면서 다시 기용되어 헌납‧사간이 되었다가, 1727년(영조 3)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다시 등장하자 성주 임지에서 삭직되어 구금되었고, 1729년 광주(光州)로 찬배(竄配)되었다가 2년 뒤 풀려나 향리인 평창으로 돌아갔다.
그뒤 승지를 여러 번 지내고, 동래접위사(東萊接慰使) 및 돈녕부도정을 지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몸가짐이 단아하고 정중하였다.
특히, 벼슬길에 있는 동안 총명한 지혜를 발휘하여, 왕에게 언로를 넓히고 직언을 구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715년(숙종 41) 식년문과 갑과에 탐화랑(探花郞: 세번째로 급제한 사람)으로 급제하여 곧 종묘직장(宗廟直長)에 제수되고, 시강원의 설서를 거쳐 정언‧지평‧헌납에 올랐다.
경종 즉위 이후 왕세제(뒤의 영조) 책봉문제를 반대한 김일경(金一鏡)일파를 소론(疏論)하다가 도리어 노론 4대신과 함께 신임사화 때 파직되었다.
영조가 즉위하면서 다시 기용되어 헌납‧사간이 되었다가, 1727년(영조 3)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다시 등장하자 성주 임지에서 삭직되어 구금되었고, 1729년 광주(光州)로 찬배(竄配)되었다가 2년 뒤 풀려나 향리인 평창으로 돌아갔다.
그뒤 승지를 여러 번 지내고, 동래접위사(東萊接慰使) 및 돈녕부도정을 지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몸가짐이 단아하고 정중하였다.
특히, 벼슬길에 있는 동안 총명한 지혜를 발휘하여, 왕에게 언로를 넓히고 직언을 구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鼓山集
英祖實錄
國朝榜目
鼓山集
[집필자]
반윤홍(潘允洪)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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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