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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호인(洪好人)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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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유재(有哉)
호(號)노포(老圃)
생년1674(현종 15)
졸년?(미상)
시대조선중기
본관남양(南陽[唐])
활동분야문신 > 문신
홍상도(洪尙度)
생부홍이도(洪以度)
조부홍처량(洪處亮)

[상세내용]

홍호인(洪好人)
1674년(현종 15)∼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唐]). 자는 유재(有哉), 호는 노포(老圃).

이조판서 홍처량(洪處亮)의 손자로, 홍이도(洪以度)의 아들이며, 홍상도(洪尙度)에게 입양되었다.

1706년(숙종 32)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1707년에 지평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당의(黨議)에 관련되어 이덕영(李德英)의 장계에 이의를 제기하고 인피대퇴(引避待退) 하였으며, 그 이듬해에도 한재(旱灾), 행전(行錢), 각 관사 아전들의 구임폐(久任弊) 등 시무에 대해 상소하였다.

1710년 장령이 되어서는 전라우수사 윤정주(尹廷舟)해곤(海閫)에 제수된 조이중(趙爾重)에 대하여 국방상 적합한 인물이 되지 못한다고 반대하고 언관들을 함부로 파직, 삭직, 원찬(遠竄)시킨 데 대하여 그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그해 진해현감으로 나갔다가 1711년 사복시정이 되었는데 부하직원의 독직사건으로 파직되었다.

이듬해 정언에 복직되고, 장령을 거쳐 1713년 필선장령정언을 거쳐, 이듬해 헌납, 1715년 집의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721년(경종 1) 신임사화로 삭직되었다가 1725년(영조 1) 우부승지충청도관찰사경기도수군절도사좌부승지를 거쳐, 1734년 함경도병마절도사, 1744년 한성부판윤을 끝으로 기로소에 들어갔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집필자]

송준호(宋寯鎬)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