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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엽(李寅燁)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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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계장(季章)
호(號)회와(晦窩)
생년1656(효종 7)
졸년1710(숙종 36)
시대조선중기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경억(李慶億)

[상세내용]

이인엽(李寅燁)
1656년(효종 7)∼1710년(숙종 3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계장(季章), 호는 회와(晦窩). 좌의정 이경억(李慶億)의 아들이다.

1684년(숙종 10)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년 뒤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일찍이, 1689년 숙종희빈장씨(禧嬪張氏) 소생을 원자로 정하는 사건을 계기로 서인이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는데, 숙종이 중전 민씨(閔氏)마저 폐하려 하자 전한림으로서 전판서 오두인(吳斗寅), 전참판 이세화(李世華), 전응교 박태보(朴泰輔) 등의 재야 서인인사들과 더불어 반대상소를 올리는 데 참여하였다.

그뒤 정계에 복귀하여 양역변통(良役變通)을 주관하였으며, 강화유수로서 치적을 남겨 사당이 세워졌다.

특히, 강화부 방비를 위한 진(鎭)의 설치에 관한 그의 견해는 탁월한 것으로 평가받아 후대까지 종종 인용되었는데, 정조대에 이르러 실제 시행에 옮겨지기도 하였다. 벼슬이 행이조판서홍문관대제학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俎豆錄

[집필자]

구완회(具琓會)

명 : "인엽(寅燁)"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大東彙纂v2鑑肅廟癸酉以楊州十陵特減田稅又於壬午以高陽八陵亦減田稅寶鑑肅廟丁丑上以侍講官李寅燁受由往來湖中問農事寅燁俱以所見白之上軫念民事遇有自四方來者輒延見咨訪如此寶鑑肅廟甲午招致濟州貢人于差備門外問賑政頭緖及島中
國朝捷錄v01字錫爾號華谷文魁慶州人壬子拜右衡寅燁父集斗高祖再思堂名元龜再思堂後父判書時發
郯述v01戊子進 父寅燁  慶州副率
御營廳謄錄v13保與他衙門冒屬之類有異歲抄時已爲啓聞頒降之故仍置於新定之役若以他閑丁充給其代則軍案次第眩亂事極難處矣寅燁曰當初存減之時三軍門及兵曹所屬元不擧論而冒錄之中以其姓名之差誤居往之不同被抄者頗多此則竝査頉下之意一
御營廳謄錄v19上曰依此爲之可也寅燁曰以米布賞給乎抑以他賞施之乎右議政李曰豈有他賞乎
御營廳謄錄v20然後可期有成若令江都獨當則決難下手臣在外時與朴權以此相議矣崔曰朴權時任留守江部李寅燁閔鎭遠曾經留守而寅燁則方任句管必有量度事各陳所見爲宜而物力容入則領府事尹留守時以爲若得米三萬石則可築云此擧大數論之也工役
御營廳謄錄v20獨當而物力不可使軍門盡力擔當朝廷拮据物力分給而監官數十人各自軍門分定使江都及諸軍門合力分築似可速成矣寅燁曰凡事豫備與猝辦功力自別而此役則殆類猝辦物力旣無宿儲軍丁亦不可使一島之民獨當若以僧軍依前調用則似勝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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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