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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진(李尙眞)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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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천득(天得)
호(號)만암(晩庵)
시호(諡號)충정(忠貞)
생년1614(광해군 6)
졸년1690(숙종 16)
시대조선중기
본관전의(全義)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영선(李榮先)

[상세내용]

이상진(李尙眞)
1614년(광해군 6)∼1690년(숙종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천득(天得), 호는 만암(晩庵).

참봉 이영선(李榮先)의 아들이다.

1645년(인조 2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52년(효종 3) 사헌부지평으로 있을 때 국가의 제반사를 논리정연하게 논평하여 왕의 신임을 받게 되고, 1654년 사간원정언으로 있을 때에는 당시의 시사(時事)를 여러 차례 직언하여 왕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헌종 때에는 이조참판대사간을 역임하고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일이 있다.

당시 영남에서는 대동법(大同法)이 아직 시행되지 않아 정무가 매우 번거로웠다. 감사로 부임한 그는 대동법으로 일어난 송사판결을 신속하고 조리있게 처결하여 송옥(訟獄)을 종식시켰다. 그리고 인재를 뽑아 쓰고 탐관오리를 숙정하여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목민관으로서의 칭송이 도내에 자자하였다.

1678년(숙종 4) 이조판서우의정을 역임하였으나, 1680년 경신대출척 결과 김익훈(金益勳)이사명(李師命) 등의 보사공신추록(保社功臣追錄)에 대한 영의정 김수항(金壽恒)과의 의견이 맞지 아니하여 추록심의에 불참하고 면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고 판중추부사로 옮겨 앉게 되었다.

1689년 왕비의 폐비문제가 거론되었을 때, “이에 관한 상소를 올리는 자는 대역죄로 다스리겠다.”는 지엄한 왕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忠憤)을 억제할 길이 없어 폐위의 부당함을 주간하다가 숙종의 진노를 샀다.

그 결과 종성북청철원 등지로 귀양갔으나, 소결(疏決)로 용서되어 부여에 있는 옛집에서 우거하다가 1690년 세상을 떠났다. 폐비로 물러나 있던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복위된 뒤 숙종은 과거를 후회하고 그의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1695년에는 청백리(淸白吏)에 선출되었다.

또 전주에 장보사원(章甫祠院)을 세우고, 1708년에는 북청에 있는 이항복(李恒福)의 사당에 함께 제사지내게 하였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承政院日記
燃藜室記述
甲乙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홍순창(洪淳昶)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2-02-07본인의 문과방목을 참고하여 부명 이영광(李榮光)을 이영선(李榮先)으로 수정함.[수정자: 이재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