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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명(金之鳴)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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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겸(子謙)
호(號)양망재(兩忘齋)
생년1607(선조 40)
졸년1684(숙종 10)
시대조선중기
본관부령(扶寧)
활동분야학자 > 유생
김연(金沇)
여산송씨(礪山宋氏)
조부김익복(金益福)
증조부김광(金光)
처부송처중(宋處中)
출생지전북 남원군(南原郡) 금릉(金陵)
저서『양망유고(兩忘遺稿)』

[상세내용]

김지명(金之鳴)
1607년(선조 40)∼1684년(숙종 10). 조선 중기 유학자. 자는 자겸(子謙), 호는 양망재(兩忘齋)이며, 본관은 부안(扶安)이며 전북 남원군(南原郡) 금릉(金陵)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는 김광(金光)이고 조부는 김익복(金益福)이며, 부친은 도촌(陶村) 김연(金沇)이며 모친은 여산송씨(礪山宋氏)이다. 처부는 현감(縣監) 송처중(宋處中)이다.

33세 때인 1639년(인조 17)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 12위로 합격하였다. 품성이 준수하고 기상이 온아(溫雅)하며 학문에 잠심(潛心)하여 나이가 많아질수록 덕도 따라서 높아지니 세인이 모두 존경하고 복종하였다. 학문은 중부(仲父)인 재간당(在澗堂) 김화(金澕)에게서 수학하였다.

『효종실록(孝宗實錄)』에 의하면, 그가 진사에 합격하던 해 상소하여 임진왜란에 순절한 증찬성(贈贊成) 황진(黃進)증판서(贈判書) 이복남(李福男)의 사당에 이름을 내려줄 것과, 당시 구례현감(求禮縣監) 이원춘(李元春)이 포증(褒贈)의 은전을 받지 못하였으니 증전(贈典)을 내려줄 것을 청하고 그 답을 받았다.

만년에는 거처하는 곳을 '양망(兩忘)'이라 편액(扁額)하고 후진을 기르며 주위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그의 『양망유고(兩忘遺稿)』『부안김씨세고(扶安金氏世稿)』에 합철되어 간행되었다. 행장(行狀)은 이이근(李頤根)이 기록하고, 묘갈명(墓碣銘)은 유척기(兪拓基)가 찬(撰)하였다.

[참고문헌]

국조인물고
양망유고
효종실록
CD-ROM 사마방목
용성지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집필자]

김동섭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