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양(尹瀁)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724C591FFFFB1603X0 |
자(字) | 심원(深源) |
생년 | 1603(선조 36) |
졸년 | 1641(인조 19)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파평(坡平)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윤응열(尹應說) |
[관련정보]
[상세내용]
윤양(尹瀁)
1603년(선조 36)∼1641년(인조 1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심원(深源). 오위(五衛)의 부사과(副司果)를 지낸 윤응열(尹應說)의 아들이다.
1624년(인조 2) 생원이 되고, 1631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에 보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도(江都)에 가서 검찰부사 이민구(李敏求)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으며, 이듬해 정월 군량수송의 책임자인 독향사(督餉使)로 호남 지방에 갔으나 돌아오기도 전에 청나라와 화의가 성립되므로 그해 6월 연원(連原)의 찰방(察訪)에 부임하였다가,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서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로 춘추관기사관(春秋官記事官)을 겸하였다.
그뒤 병조좌랑‧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을 역임하고, 1640년 결성현감(結城縣監)을 거쳐, 칠곡부사(漆谷府使)로 있으면서 부성(府城)을 신축하고 기계(器械)와 군량미 비축을 위하여 백방으로 심혈을 기울이다가 그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문장에도 뛰어나 입시(入侍)할 때마다 문서 기록에 나는 것처럼 빨리하면서도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1624년(인조 2) 생원이 되고, 1631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에 보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도(江都)에 가서 검찰부사 이민구(李敏求)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으며, 이듬해 정월 군량수송의 책임자인 독향사(督餉使)로 호남 지방에 갔으나 돌아오기도 전에 청나라와 화의가 성립되므로 그해 6월 연원(連原)의 찰방(察訪)에 부임하였다가,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서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로 춘추관기사관(春秋官記事官)을 겸하였다.
그뒤 병조좌랑‧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을 역임하고, 1640년 결성현감(結城縣監)을 거쳐, 칠곡부사(漆谷府使)로 있으면서 부성(府城)을 신축하고 기계(器械)와 군량미 비축을 위하여 백방으로 심혈을 기울이다가 그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문장에도 뛰어나 입시(入侍)할 때마다 문서 기록에 나는 것처럼 빨리하면서도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집필자]
조계찬(趙啓纘)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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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