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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작(呂焯)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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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회중(晦仲)
호(號)호계(虎溪)
생년1586(선조 19)
졸년1652(효종 3)
시대조선중기
본관성산(星山)
활동분야문신
여윤서(呂允恕)

[상세내용]

여작(呂焯)
1586년(선조 19)~1652년(효종 3). 조선 중기 문신. 자는 회중(晦仲)이고, 호는 호계(虎溪)이다.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증조부는 여희임(呂希臨)이고, 조부는 여심(呂沈)이다. 부친 여윤서(呂允恕)와 모친 문면(文勉)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이근(李謹)의 딸이다.

1623년(인조 1)에는 성주(星州)에 속한 선비들이 오랜 기간 동안 금고(禁錮)를 당한 것을 위로하기 위하여, 성주에서 시험을 보아 인재를 뽑도록 특별 명령이 내려졌다. 그 결과 김주(金輳) 등과 함께 전시(殿試)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고, 1624년(인조 2) 증광시 문과에서 병과 7위로 급제하였다.

1645년(인조 23)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姜氏)가 조소용(趙昭容) 등을 저주하기 위해 흉계를 꾸몄는데, 당시 궁녀였던 신생(辛生)은 이 사실을 인조에게 밀고하여 관련자들이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신생은 밀고한 공을 인정받아서, 임금의 특명으로 목숨을 부지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후 1647년(인조 25) 신생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면서 재차 조사가 이루어졌고, 그녀와 일부 관계자들이 흉계에 가담한 사실이 추가적으로 밝혀졌다. 그 결과 신생은 관련자들과 함께 옥에 갇히게 되었고, 소현세자의 아들들은 유배를 당하였다.

여작(呂焯)은 1649년(효종 즉위년)에 봉례(奉禮)로 재직 중이었는데,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서 신생의 죄목을 재차 거론하며 국문을 시행하여 엄벌에 처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상소의 문구가 무례하다는 내용으로 질책을 받았다.

[참고문헌]

國朝文科榜目
仁祖實錄
孝宗實錄

[집필자]

정병섭
수정일수정내역
2011-10-31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