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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李坰)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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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동야(東野)
호(號)오수(聱叟)
생년1580(선조 13)
졸년1670(현종 11)
시대조선중기
본관벽진(碧珍)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상길(李尙吉)

[상세내용]

이경(李坰)
1580년(선조 13)∼1670년(현종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동야(東野), 호는 오수(聱叟). 공조판서 이상길(李尙吉)의 아들이다.

1621년(광해군 13) 유학으로 있을 때 이이첨(李爾瞻)구경록(仇景祿)의 옥사에 자기 아들이 관련되어 역옥을 늦추자 이를 논박하는 소를 올렸다.

1623년(인조 1) 진사로서 개시문과(改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1624년 예문관검열이 되었고, 그해 8월 장령으로 있으면서 집의 김세렴(金世濂), 장령 박안제(朴安悌) 등과 함께 이조판서 이귀(李貴)가 추숭(追崇)을 주장하고 자천한 것을 논박하다가 중신을 모함하였다는 죄목으로 당진현감에 좌천되었다.

그뒤 1626년에 정언지평을 거쳤다.

1628년 3월 사서로 있으면서 국역(鞫逆)의 날에 병을 칭탁하여 불사(不仕)하였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같은해 6월에 정언에 임명된 뒤 강진현감장령 등을 두루 거쳤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천도가 이루어질 때 아버지 이상길이 적군이 상륙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소모사(召募使)가 되어 직분을 다할 것을 부탁하고 강도(江都)에 입성하여 자결하였는데 그는 포구를 지키던 그의 임무를 저버리고 아버지의 시신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그가 비록 의병에 종사하였다고 하나 자처(自處)의 도가 어긋났다고 하여 파직당하였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大東野乘

[집필자]

김학동(金㶅東)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