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후(金靜厚)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C815D6C4B1576X0 |
자(字) | 사외(士畏) |
호(號) | 파옥진인(破屋陳人) |
생년 | 1576(선조 9) |
졸년 | 1640(인조 18)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예안(禮安)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김현도(金玄度) |
출신지 | 개성 |

[관련정보]
[상세내용]
김정후(金靜厚)
1576년(선조 9)∼1640년(인조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사외(士畏), 호는 동리산인(東籬散人)‧파옥진인(破屋陳人). 개성 출신. 부친은 김현도(金玄度)이다.
1605년(선조 38)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전적에 올랐다.
1613년(광해군 5) 보령현감이 되었다. 그때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이 이이첨(李爾瞻) 등의 무고로 역적에 몰려 죽게 되었는데, 이를 경축하는 감사의 전문(箋文)을 지으라는 부탁을 받고 그를 거절하자 노여움을 사 구금당하였으나 조금도 굽히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인조반정 후 예안현감이 되었다가, 전적‧직강(直講) 등 경직을 역임하고 다시 옹진군수로 나갔으나 고관의 비위에 거슬려 파직당했다.
그는 명문장가라는 격찬을 받은 최립(崔岦)의 문인으로서 송도인(松都人)의 문사가 되었다.
1605년(선조 38)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전적에 올랐다.
1613년(광해군 5) 보령현감이 되었다. 그때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이 이이첨(李爾瞻) 등의 무고로 역적에 몰려 죽게 되었는데, 이를 경축하는 감사의 전문(箋文)을 지으라는 부탁을 받고 그를 거절하자 노여움을 사 구금당하였으나 조금도 굽히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인조반정 후 예안현감이 되었다가, 전적‧직강(直講) 등 경직을 역임하고 다시 옹진군수로 나갔으나 고관의 비위에 거슬려 파직당했다.
그는 명문장가라는 격찬을 받은 최립(崔岦)의 문인으로서 송도인(松都人)의 문사가 되었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공원영(孔黿泳)
대표명 | 김정후(金靜厚) |
성명 | 김정후(金靜厚) |
자 | 사외(士畏) |
호 | 동리산인(東籬散人), 인재(認齋) |
성명 : "김정후(金靜厚)"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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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