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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건(宋希建)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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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립(仲立)
생년1572(선조 5)
졸년1633(인조 11)
시대조선중기
본관은진(恩津)
활동분야문신 > 문신
송계수(宋桂壽)
생부송남수(宋枏壽)
평산신씨(平山申氏)
전주이씨(全州李氏)
처부이천유(李天裕)

[상세내용]

송희건(宋希建)
1572년(선조 5)∼1633년(인조 11).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중립(仲立).

송씨가 멀리 대서(代序)가 있어서 고려 말에 사헌부집단(司憲府執端) 송명의(宋明誼)가 비로소 회덕에 이사하였다. 집단공 이후에 대대로 이름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 부친 송남수(宋枏壽)임천군수(林川郡守)를 지내고 고향에 물러나서 우로전(優老典: 나이 많은 사람에게 특별히 내리는 벼슬)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승품되었다.

그가 아버지의 명으로 중부(仲父) 삼가현감(三嘉縣監) 송계수(宋桂壽)의 양자로 입후되어, 친아버지처럼 섬겼다. 장사에 슬퍼하고 제사에 공경하는 것을 다 예에 따랐다.

1610년(광해군 2) 경술(庚戌) 식년시(式年試)에서 생원(生員) 2등 9위와 진사(進士) 3등 10위로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선비들과 벗들이 대과에 급제할 것을 기대하였는데 성취하지 못하고 말았다. 오수(獒樹)금정(金井)찰방을 거쳐서 세자익위사부솔(世子翊衛司副率)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를 거쳐 다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다가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으로 전근되었다. 다시 선발되어 안동대도호부판관(安東大都護府判官)이 되었다. 부임한 지 한 달쯤 넘어서 병으로 하세하였다. 7월에 임천공 묘 뒤에 건좌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초취는 평산신씨(平山申氏)인데 아들이 없다. 재취는 전주이씨(全州李氏) 주부(主簿) 이천유(李天裕)의 딸이다. 너그럽고 정숙하고 현철하였다. 남편을 잘 섬기고 시부모에게 효도하여 예에 어긋남이 없었다. 친족에게 대하매 도리가 있고 비복은 은혜로써 다스렸으므로 상하와 내외(內外: 집안팎)로 다 인심을 얻었다. 4남 4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생원 송국시(宋國蓍)송국보(宋國輔)송국구(宋國龜), 송국신(宋國藎)이다.

[참고문헌]

大德郡誌

[집필자]

이원배
수정일수정내역
2008-12-31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