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무림(李茂林)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BB34B9BCB1525X0 |
자(字) | 장경(長卿) |
생년 | 1568(선조 1)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전의(全義) |
활동분야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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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 이보명(李寶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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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내용]
이무림(李茂林)
1568년(선조 1)~미상.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장경(長卿)이다.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부친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전행산음현감(前行山陰縣監) 이보명(李寶命)이다. 형은 이영림(李榮林)이고, 동생은 이광림(李光林)‧이경림(李慶林)이다.
1605년(선조 38)에 증광시 생원 2등 22위로 입격하였다.
1613년(광해군 5)에 있었던 계축옥사(癸丑獄事)와 다음 해에 있었던 갑인봉사(甲寅封事)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을 추국할 때 공을 세워 수령(守令)에 제수되었다. 1616년(광해군 8) 단성현감(丹城縣監)에 임명되었으나, 사헌부(司憲府)는 그가 피폐해진 단성현(丹城縣)을 복구하는데 적합한 인물이 아니므로 새로운 인물을 보낼 것을 간언하였다. 1617년(광해군 9) 황연도우봉현령(黃延道牛峰縣令)으로 재직할 때 1616년(광해군 8)에 폐모론으로 인해 부관참시(剖棺斬屍)된 김제남(金悌男)의 종인 북간(北間)을 붙잡는 일을 지휘하였고, 1620년(광해군 12)에는 우봉현을 잘 다스렸다는 평가를 받아 승급되었다. 1630년(인조 8) 양근군수(楊根郡守)로 재직할 때, 사간원이 그의 성품이 간사하고 교활하여, 광해군 때 뇌물로 관직을 얻었고, 군수 부임 후에도 탐학한 행동을 일삼는다고 지적하며 파직을 청하였다.
부친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전행산음현감(前行山陰縣監) 이보명(李寶命)이다. 형은 이영림(李榮林)이고, 동생은 이광림(李光林)‧이경림(李慶林)이다.
1605년(선조 38)에 증광시 생원 2등 22위로 입격하였다.
1613년(광해군 5)에 있었던 계축옥사(癸丑獄事)와 다음 해에 있었던 갑인봉사(甲寅封事)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을 추국할 때 공을 세워 수령(守令)에 제수되었다. 1616년(광해군 8) 단성현감(丹城縣監)에 임명되었으나, 사헌부(司憲府)는 그가 피폐해진 단성현(丹城縣)을 복구하는데 적합한 인물이 아니므로 새로운 인물을 보낼 것을 간언하였다. 1617년(광해군 9) 황연도우봉현령(黃延道牛峰縣令)으로 재직할 때 1616년(광해군 8)에 폐모론으로 인해 부관참시(剖棺斬屍)된 김제남(金悌男)의 종인 북간(北間)을 붙잡는 일을 지휘하였고, 1620년(광해군 12)에는 우봉현을 잘 다스렸다는 평가를 받아 승급되었다. 1630년(인조 8) 양근군수(楊根郡守)로 재직할 때, 사간원이 그의 성품이 간사하고 교활하여, 광해군 때 뇌물로 관직을 얻었고, 군수 부임 후에도 탐학한 행동을 일삼는다고 지적하며 파직을 청하였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承政院日記
承政院日記
[집필자]
손용석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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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