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중(黃有中)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D669C720C911B1564X0 |
자(字) | 중정(仲正) |
호(號) | 조대(釣臺) |
생년 | 1564(명종 19) |
졸년 | 1620(광해군 12)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창원(昌原)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황섬(黃暹) |
[관련정보]
[상세내용]
황유중(黃有中)
1564년(명종 19)∼1620년(광해군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중정(仲正), 호는 조대(釣臺). 대사헌 황섬(黃暹)의 아들이다.
일찍이 학문에 힘써 생원시에 합격한 뒤, 정시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당시 시관이던 아버지가 그의 글을 알아보고 급제를 취소하였다. 뒤에 음보(蔭補)로 출사하였다가 1605년(선조 38) 교관(敎官)으로서 생원시에 합격하고, 1606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전적‧병조좌랑을 지내고 홍문관에 들어갔다.
1608년(광해군 즉위)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세자로 옹립하려던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대북파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의 탄핵을 받고 유배될 때 아버지 황섬이 유영경의 처남인 관계로 파직되자, 그도 벼슬을 버리고 풍기(豊基)에 따라가 은거하였다.
뒤에 고산‧금교의 찰방을 지냈다.
일찍이 학문에 힘써 생원시에 합격한 뒤, 정시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당시 시관이던 아버지가 그의 글을 알아보고 급제를 취소하였다. 뒤에 음보(蔭補)로 출사하였다가 1605년(선조 38) 교관(敎官)으로서 생원시에 합격하고, 1606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전적‧병조좌랑을 지내고 홍문관에 들어갔다.
1608년(광해군 즉위)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세자로 옹립하려던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대북파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의 탄핵을 받고 유배될 때 아버지 황섬이 유영경의 처남인 관계로 파직되자, 그도 벼슬을 버리고 풍기(豊基)에 따라가 은거하였다.
뒤에 고산‧금교의 찰방을 지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집필자]
이원근(李元根)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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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