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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영(李再榮)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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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여인(汝仁)
생년1553(명종 8)
졸년1623(인조 1)
시대조선중기
본관영천(永川)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선(李選)

[상세내용]

이재영(李再榮)
1553년(명종 8)∼1623년(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여인(汝仁).

부친은 증이조판서 이선(李選)이다.

서얼 출신으로 임진왜란 중에 제정한 군공절목(軍功節目)에 따라 참급(斬級) 군공으로 허통(許通)되어 1599년(선조 32) 정시문과에 장원하였다. 출신문벌이 천한 사람은 비록 과거에 급제하여도 관직을 주지 않고 승문원한이학관(漢吏學官)으로 삼았는데, 그런 예에 따라 그도 한이학관이 되었다.

1606년(선조 39) 회답사(回答使) 여우길(呂祐吉)일본에 갈 때 그를 데리고 가려 하였으나, 사대문서(事大文書)의 작성에 능통한 그가 자리를 비우면 이를 전담할 사람이 없음을 이유로, 승문원에서 반대하여 가지 못하였다.

1615년(광해군 7) 승문원교검에 이어 이듬해 봉상시주부가 되었는데, 허균(許筠)의 익명서 사건에 본래 그가 허균의 문객(門客)으로 가까웠던 까닭에 글을 그가 지었다는 제보로 곤경에 처하였다. 고양군수를 역임하고, 1621년(광해군 13) 원접사 이이첨(李爾瞻)제술관이 되었다.

병려(騈儷) 문장에 뛰어나 오랫동안 명나라 사신이 오면 필찰(筆札)을 맡았다. 과거시험 때마다 남의 글을 대신 지어 주었으며, 특히 이이첨의 여러 아들을 부정하게 합격시킨 것은 그의 소행이었다 하여 인조반정 후 국문(鞫問)을 받다가 매맞아 죽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文科榜目
燃藜室記述

[집필자]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