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일(金萬鎰)
[요약정보]
| UCI | G002+AKS-KHF_13AE40B9CCC77CB1550X0 | 
| 자(字) | 중림(重臨) | 
| 생년 | 1550(명종 5) | 
| 졸년 | 1632(인조 10) | 
| 시대 | 조선중기 | 
| 본관 | 경주(慶州) | 
| 활동분야 | 변란 > 공신 | 

| 출신지 | 제주도 남원읍(南元邑) 의귀리(衣貴里) | 
| 공신호 | 숭정대부(崇政大夫)헌마공신(獻馬功臣) | 

[상세내용]
김만일(金萬鎰)
1550년(명종 5)∼1632년(인조 10). 조선 중기 목장주‧말사육가‧공신. 자는 중림(重臨)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제주도 남원읍(南元邑) 의귀리(衣貴里) 출신이다.
노복(奴僕)을 많이 거느렸고, 개인 목장을 두어 1만 필이나 되는 말을 길렀으며 땅은 한라산 일대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였다. 임진왜란 후 전마(戰馬)의 수급을 돕기 위해 1594년(선조 27)에 말 2백 필을 헌납하였으므로 논상(論賞)되어 그의 3대조까지 참의(參議), 참판(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1620년(광해군 12)에는 다시 5백 필을 진헌(進獻)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오위도총부총관(五衛都摠府摠管)직에 제수(除授)되었다. 이후 1627년(인조 5)에도 다시 4∼5백 필의 말을 헌납하였다. 이러한 여러 차례의 공적으로 1628(인조 6)에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 헌마공신(獻馬功臣)에 올랐으며, 그 후손들에게 대대로 산마감목관(山馬監牧官)의 벼슬이 주어지는 특혜를 받았다.
노복(奴僕)을 많이 거느렸고, 개인 목장을 두어 1만 필이나 되는 말을 길렀으며 땅은 한라산 일대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였다. 임진왜란 후 전마(戰馬)의 수급을 돕기 위해 1594년(선조 27)에 말 2백 필을 헌납하였으므로 논상(論賞)되어 그의 3대조까지 참의(參議), 참판(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1620년(광해군 12)에는 다시 5백 필을 진헌(進獻)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오위도총부총관(五衛都摠府摠管)직에 제수(除授)되었다. 이후 1627년(인조 5)에도 다시 4∼5백 필의 말을 헌납하였다. 이러한 여러 차례의 공적으로 1628(인조 6)에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 헌마공신(獻馬功臣)에 올랐으며, 그 후손들에게 대대로 산마감목관(山馬監牧官)의 벼슬이 주어지는 특혜를 받았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
국조보감
응천일록(凝川日錄)
오름(http://oreum.kr/1642)
국조보감
응천일록(凝川日錄)
오름(http://oreum.kr/1642)
[집필자]
김은영
| 수정일 | 수정내역 | 
|---|---|
| 2009-09-30 | 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