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덕원(羅德元)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098B355C6D0B1548X0 |
자(字) | 이건(以健) |
호(號) | 사담(沙潭) |
생년 | 1548(명종 3)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중기 |
본관 | 금성(錦城)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나열(羅悅) |
저서 | 『사담유고(沙潭遺稿)』 |
[상세내용]
나덕원(羅德元)
1548년(명종 3)∼미상. 조선 중기 문신‧의병. 자는 이건(以健)이고, 호는 사담(沙潭)이다. 본관은 금성(錦城)이다.
부친은 나열(羅悅)이고 동생으로 나덕종(羅德種), 나덕부(羅德符), 나덕기(羅德基), 나덕립(羅德立)이 있다.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을 사사하였다.
1573년(선조 6)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6위로 합격하여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에 제수(除授)되었다. 1580년(선조 13) 경 함평군(咸平郡) 학교면(鶴橋面) 금송리(錦松里)로 이거하면서 금성나씨(錦城羅氏) 이조판서공파 함평 입향조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모사(召募使)로 각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1594년(선조 27)에 오수찰방(獒樹察訪)이 되어 군량을 감독하였고, 함창현감 겸 운량차사(咸昌縣監兼咸昌縣監)가 되어 명나라 군대에 군량을 보급하였다. 찬획사(贊劃使) 황신주(黃愼周)와 함께 모두포(毛豆浦)에 주둔하고 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공격하기 위해 문경(聞慶) 유곡역(幽谷驛)으로 들어가다가, 명나라 장수를 돕기 위해 울산(蔚山)으로 진격하였다. 전투 중 동생 나덕립이 전사하였으며, 이후 강화가 이루어져 포위망을 풀었다. 왜란 후 고향으로 돌아와 지냈다.
그의 문집으로 『사담유고(沙潭遺稿)』가 전해진다.
부친은 나열(羅悅)이고 동생으로 나덕종(羅德種), 나덕부(羅德符), 나덕기(羅德基), 나덕립(羅德立)이 있다.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을 사사하였다.
1573년(선조 6)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6위로 합격하여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에 제수(除授)되었다. 1580년(선조 13) 경 함평군(咸平郡) 학교면(鶴橋面) 금송리(錦松里)로 이거하면서 금성나씨(錦城羅氏) 이조판서공파 함평 입향조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모사(召募使)로 각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1594년(선조 27)에 오수찰방(獒樹察訪)이 되어 군량을 감독하였고, 함창현감 겸 운량차사(咸昌縣監兼咸昌縣監)가 되어 명나라 군대에 군량을 보급하였다. 찬획사(贊劃使) 황신주(黃愼周)와 함께 모두포(毛豆浦)에 주둔하고 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공격하기 위해 문경(聞慶) 유곡역(幽谷驛)으로 들어가다가, 명나라 장수를 돕기 위해 울산(蔚山)으로 진격하였다. 전투 중 동생 나덕립이 전사하였으며, 이후 강화가 이루어져 포위망을 풀었다. 왜란 후 고향으로 돌아와 지냈다.
그의 문집으로 『사담유고(沙潭遺稿)』가 전해진다.
[참고문헌]
함평군사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index.jsp)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index.jsp)
[집필자]
박경이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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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30 | 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