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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개청(鄭介淸)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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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의백(義伯)
호(號)곤재(困齋)
생년1529(중종 24)
졸년1590(선조 23)
시대조선전기
본관고성(固城)
활동분야문신 > 문신
정세웅(鄭世雄)
출신지나주
저서『우득록(愚得錄)』

[상세내용]

정개청(鄭介淸)
1529년(중종 24)∼1590년(선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의백(義伯), 호는 곤재(困齋). 나주 출신. 정세웅(鄭世雄)의 아들이다.

유년시에 보성군의 영주산사(瀛州山寺)에 들어가 10여년간 성리학뿐 아니라 천문‧지리‧의약‧복서(卜筮) 등의 잡학을 강구하였다.

그뒤 산에서 나와, 경사(京師)에서 박순(朴淳) 등과 종유하며 학문을 강구한 뒤, 만년에 전라도 무안의 엄담(淹潭)에 이주하여 윤암(巖)에 정사를 짓고 학문에 힘쓰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는 특히 예학(禮學)과 성리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당시 호남지방의 명유로 알려졌다.

1574년(선조 7)에 전라감사 박민헌(朴民獻), 1583년 영의정 박순에 의하여 유일(遺逸)로 천거되기도 하였는데, 수차의 관직제수를 극구 사양함으로써 그의 관직생활은 46세에 북부참봉을 지낸 이후 55세에 나주훈도, 58세에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 그리고 60세 되던 해 이산해(李山海)의 천거로 곡성현감을 지내는 데 그치고 있다.

1589년에 정여립(鄭汝立)의 모역사건이 일어나고 이의 처리과정상 그 연루자의 색출이 지방의 사류에게까지 확대되는 와중에서, 1590년 5월 정여립과 동모하였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같은해 6월 함경도 경원 아산보(阿山堡)로 이배되고, 7월에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가문이나 관직생활은 별다른 특이점이 없는 평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사상(史上)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기축옥사에 피화된 뒤 그의 제자들이 신원운동을 치열히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1616년(광해군 8)에 그를 봉사하는 자산서원(紫山書院)이 엄담에 건립되어 그뒤 1694년(숙종 20)까지 집권세력의 당색에 따라 수차례에 걸쳐 치폐(置廢)를 반복하여 서원과 당쟁의 연계라는 드문 예를 보여준 데 있다 할 것이다.

자산서원의 치폐는 남인의 집권시에 건립, 복설되고, 서인의 집권시에는 훼철되는 우여곡절을 겪는데, 이 과정에서 그에 대한 포폄도 기복을 겪는다.

또한, 호남지방의 사류들이 다수 이 분쟁에 관련됨으로써 조선 후기 정치사의 전개과정에 대한 이해에 매우 중요한 하나의 쟁점을 제공하고 있다.

그의 스승으로는 서경덕(徐敬德)박순의 이름이 거론되나 전후사정을 검토해볼 때 박순에의 종유설이 보다 타당하게 보인다.

그의 문생들은 400여명에 달하였다 하는데, 그 중 저명한 자로는 나덕준(羅德峻)나덕윤(羅德潤)‧나덕현(羅德顯)‧나덕원(羅德元)안중묵(安重黙)최홍우(崔弘宇)정식(鄭湜)유양(柳瀁)윤제(尹濟)정지함(鄭之諴) 등 당시 호남 지방의 유력한 가문출신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음이 주목된다.

저서로 『우득록(愚得錄)』이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肅宗實錄

[집필자]

김동수(金東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