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룡(金應龍)
[요약정보]
| UCI | G002+AKS-KHF_13AE40C751B8E1B1546X0 |
| 자(字) | 인서(麟瑞) |
| 호(號) | 남강(南岡) |
| 생년 | 1546(명종 1) |
| 졸년 | 1597(선조 30) |
| 시대 | 조선중기 |
| 본관 | 청도(淸道) |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 출생지 | 전라북도 고창(高敞) |
| 공신호 |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

[상세내용]
김응룡(金應龍)
1546년(명종 1)∼1597년(선조 30).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인서(麟瑞)이고 호는 남강(南岡)이다. 본관은 청도(淸道)이며, 전라북도 고창(高敞)에서 태어났다.
김지대(金之岱)의 후손이다. 1592년(선조 15) 임진왜란 때 조야(朝野)가 당황하며 제대로 된 계책을 내놓지 못하자, 그는 두 동생과 재종제(再從弟) 김몽룡(金夢龍), 사위 김진(金璡)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권율(權慄) 장군의 의병 모집 격문을 보자마자 달려가 백의종군(白衣從軍)하였다. 그는 뱃길로 전쟁 물자를 수송하는 등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무장면(茂長面) 동백호(冬柏湖)를 오가며 공을 세웠다. 이후 행주대첩(幸州大捷)에 참전하여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으며, 이때 동생 김응구 역시 형의 원수를 갚겠다며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 공으로 1605년(선조 34)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오르고,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다.
1704년(숙종 30)에는 경상남도 밀양군(密陽郡) 청도면(淸道面)에 김지대를 추모하기 위하여 남계서원(南溪書院)을 세웠는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자, 그 후 전라북도 무장향교(茂長鄕校) 유생들이 1981년 고창군(高敞郡) 상하면(上下面) 검산리(劍山里)로 옮겨 복원하였다. 이 때 명칭을 계산서원으로 고치고 시조 김지대, 김응룡(金應龍), 김몽룡(金夢龍) 등을 추가 배향하였다.
김지대(金之岱)의 후손이다. 1592년(선조 15) 임진왜란 때 조야(朝野)가 당황하며 제대로 된 계책을 내놓지 못하자, 그는 두 동생과 재종제(再從弟) 김몽룡(金夢龍), 사위 김진(金璡)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권율(權慄) 장군의 의병 모집 격문을 보자마자 달려가 백의종군(白衣從軍)하였다. 그는 뱃길로 전쟁 물자를 수송하는 등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무장면(茂長面) 동백호(冬柏湖)를 오가며 공을 세웠다. 이후 행주대첩(幸州大捷)에 참전하여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으며, 이때 동생 김응구 역시 형의 원수를 갚겠다며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 공으로 1605년(선조 34)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오르고,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다.
1704년(숙종 30)에는 경상남도 밀양군(密陽郡) 청도면(淸道面)에 김지대를 추모하기 위하여 남계서원(南溪書院)을 세웠는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자, 그 후 전라북도 무장향교(茂長鄕校) 유생들이 1981년 고창군(高敞郡) 상하면(上下面) 검산리(劍山里)로 옮겨 복원하였다. 이 때 명칭을 계산서원으로 고치고 시조 김지대, 김응룡(金應龍), 김몽룡(金夢龍) 등을 추가 배향하였다.
[참고문헌]
무장읍지
호남절의록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典故大方
太學志(成均館, 1984)
호남절의록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典故大方
太學志(成均館, 1984)
[집필자]
이은영
| 수정일 | 수정내역 |
|---|---|
| 2009-09-30 | 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