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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수(金忠秀)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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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중심(中心)
호(號)귀암(龜巖)
생년1538(중종 33)
졸년1597(선조 30)
시대조선전기
본관나주(羅州)
활동분야호국 > 의병
김적(金適)
조부김수남(金粹南)
출신지전라남도 무안(務安)
공신호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상세내용]

김충수(金忠秀)
1538년(중종 33)∼1597년(선조 30). 조선 전기 의병. 자는 중심(中心), 호는 귀암(龜巖)이며,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전라남도 무안(務安) 출신으로, 조부는 김수남(金粹南)이고, 부친은 통훈대부(通訓大夫) 광주목사(光州牧使) 김적(金適)이다. 두 동생이 있는데, 김효수(金孝秀)‧유학(幼學) 김덕수(金德秀)이다.

21세 때인 1558년(명종 13)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52위로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에는 비분을 참지 못하고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소탕한 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일등(一等)으로 녹훈(錄勳)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제수(除授)되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장사 1천여 명을 규합, 관군(官軍)을 도우려고 떠날 때, 대규모의 적병이 몽탄강(夢灘江)을 거슬러 올라오니, 적을 맞아 분전하였으나 끝내 패퇴하여 전사하였다. 부인도 그때 함께 순절하여, 나라에서 그의 고향에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다.

1704년(숙종 30) 창건한 우산사(牛山祠: 현재 전남 무안군 몽탄면 사창리 매을마을 소재)에 배향(配享)되었다.

[참고문헌]

전라남도지
CD-ROM 사마방목

[집필자]

김동섭
수정일수정내역
2009-09-30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