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사웅(安士雄)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548C0ACC6C5B1505X0 |
자(字) | 위백(偉伯) |
생년 | 1505(연산군 11) |
졸년 | 1592(선조 25)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광주(廣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안자흠(安子欽) |
[관련정보]
[상세내용]
안사웅(安士雄)
1505년(연산군 11)∼1592년(선조 2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위백(偉伯). 안자흠(安子欽)의 아들이다.
1542년(중종 37)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46년(명종 1) 왕의 즉위를 경축하기 위한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헌부장령‧집의를 거쳐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친형제가 일찍 죽었으므로 그 자녀들을 함께 양육하였는데, 먼저 형제의 자녀들을 혼인시키고 나서야 자신의 자녀들을 혼인시킴으로써 주위의 칭찬을 받았다.
또한, 청백리 안성(安省)의 후손으로서 가풍을 유지하였으므로 집안이 가난하였다. 승지로 있을 때 왕십리에서 출근하였는데 지각이 잦아, 이를 왕이 알고서 특별히 낙산(駱山)에 집 한채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아들과 함께 죽었다.
1542년(중종 37)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46년(명종 1) 왕의 즉위를 경축하기 위한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헌부장령‧집의를 거쳐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친형제가 일찍 죽었으므로 그 자녀들을 함께 양육하였는데, 먼저 형제의 자녀들을 혼인시키고 나서야 자신의 자녀들을 혼인시킴으로써 주위의 칭찬을 받았다.
또한, 청백리 안성(安省)의 후손으로서 가풍을 유지하였으므로 집안이 가난하였다. 승지로 있을 때 왕십리에서 출근하였는데 지각이 잦아, 이를 왕이 알고서 특별히 낙산(駱山)에 집 한채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아들과 함께 죽었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志
宣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志
[집필자]
박광용(朴光用)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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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