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규년(南虬年)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0A8ADDCB144B1496X0 |
자(字) | 영로(靈老) |
생년 | 1496(연산군 2)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고성(固城) |
활동분야 | 문신 |

부 | 남세주(南世周) |

[관련정보]
[상세내용]
남규년(南虬年)
1496년(연산군 2)~미상. 조선 전기 문신. 자는 영로(靈老)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거주지는 한양(漢陽: 현 서울)이다.
증조부는 남금(南琴)이고, 조부는 남익문(南益文)이며, 부친은 남세주(南世周)이다. 외조부는 서성부정(瑞城副正) 이덕식(李德植)이고, 처부는 유희저(柳希渚)이며, 숙부로 남세담(南世聃)이다.
1519년(중종 14) 식년시에 생원 3등 24위로 합격한 후, 같은 해 식년시에서 진사시 3등 36위로 합격하였다. 1538년(중종 33) 알성시에 응시하여 병과 3위로 문과 급제하였고, 검열(檢閱)‧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겸춘추(兼春秋)‧예조좌랑(禮曹佐郞)‧의성현령(義城縣令)‧형조정랑(刑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1541년(중종 36) 예문관봉교 재임 시절 사관(史官)에 발탁되었으나 평소 아첨하는 일에 힘쓰고 모친의 상(喪)에 근신하지 않는 등 사관에 적합하지 않다는 상소가 올라와 체직(遞職)되었다. 또 이러한 행실이 문제되어 겸춘추에 제수되자마자 체직되었다. 1544년(중종 39) 의령현령 재임 시절 상을 당한 김응해(金應海)와 이헌(李軒) 사이에 노비(奴婢)에 관한 송사가 있었는데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가혹한 형문(刑問)으로 이헌을 추고(推考)하다가 송사 도중 이헌이 죽고 말았다. 이 일이 알려져 파직(罷職)되었다. 1545년(인종 1) 형조정랑 재임 시절에 청나라에 사행을 떠날 동지사서장관(冬至使書狀官)으로 발탁되었으나 이전의 품행이 문제가 되면서 임명이 철회되었다.
증조부는 남금(南琴)이고, 조부는 남익문(南益文)이며, 부친은 남세주(南世周)이다. 외조부는 서성부정(瑞城副正) 이덕식(李德植)이고, 처부는 유희저(柳希渚)이며, 숙부로 남세담(南世聃)이다.
1519년(중종 14) 식년시에 생원 3등 24위로 합격한 후, 같은 해 식년시에서 진사시 3등 36위로 합격하였다. 1538년(중종 33) 알성시에 응시하여 병과 3위로 문과 급제하였고, 검열(檢閱)‧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겸춘추(兼春秋)‧예조좌랑(禮曹佐郞)‧의성현령(義城縣令)‧형조정랑(刑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1541년(중종 36) 예문관봉교 재임 시절 사관(史官)에 발탁되었으나 평소 아첨하는 일에 힘쓰고 모친의 상(喪)에 근신하지 않는 등 사관에 적합하지 않다는 상소가 올라와 체직(遞職)되었다. 또 이러한 행실이 문제되어 겸춘추에 제수되자마자 체직되었다. 1544년(중종 39) 의령현령 재임 시절 상을 당한 김응해(金應海)와 이헌(李軒) 사이에 노비(奴婢)에 관한 송사가 있었는데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가혹한 형문(刑問)으로 이헌을 추고(推考)하다가 송사 도중 이헌이 죽고 말았다. 이 일이 알려져 파직(罷職)되었다. 1545년(인종 1) 형조정랑 재임 시절에 청나라에 사행을 떠날 동지사서장관(冬至使書狀官)으로 발탁되었으나 이전의 품행이 문제가 되면서 임명이 철회되었다.
[참고문헌]
正德十四年己卯式司馬榜目
國朝文科榜目
中宗實錄
仁宗實錄
國朝文科榜目
中宗實錄
仁宗實錄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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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