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벽(卞璧)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BCC0BCBDFFFFB1483X0 |
자(字) | 헌지(獻之) |
호(號) | 귀산(龜山) |
생년 | 1483(성종 14) |
졸년 | 1528(중종 23)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초계(草溪) |
활동분야 | 기타 > 처사 |

부 | 변신보(卞申甫) |
모 | 동래정씨(東萊鄭氏) |
조부 | 변효생(卞孝生) |
증조부 | 변을명(卞乙明) |
5대조 | 변중량(卞仲良) |
저서 | 『구산실기(龜山實紀)』 |

[상세내용]
변벽(卞璧)
1483년(성종 14)∼1528년(중종 23). 자는 헌지(獻之), 호는 구산(龜山). 본관은 초계(草溪).
좌승지(左承旨) 춘당(春堂) 변중량(卞仲良)의 5세손, 증조부는 변을명(卞乙明), 조부는 변효생(卞孝生)이고, 부친 변신보(卞申甫)와 모친 동래정씨(東萊鄭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3세 때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으며, 25세에 어머니의 권고로 생원시(生員試)에 응시하여 3등으로 합격하였으나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37세에 현량과(賢良科)에 추천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는데 이 해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당시 사람들이 변벽이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다고 하였다. 그 후 평생을 성리(性理) 탐구에만 전념하였다.
1582년(선조 15)에는 사림(士林)에서 선생의 어짊을 기리어 서원을 세우자는 논의가 있었고, 1707년(숙종 33)에는 병암서원(屛巖書院)에 봉안되었다. 홀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손수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봉양하는 일을 평생토록 거르는 일이 없었다.
저서로는 『구산실기(龜山實紀)』와『구산선생문집(龜山先生文集)』이 있다.
『조선인명사서(朝鮮人名辭書)』에는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의 5세손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구산집(龜山集)』은 현재 일본(日本) 경도대학(京都大學) 하합문고(河合文庫)에도 소장되어 있다.
좌승지(左承旨) 춘당(春堂) 변중량(卞仲良)의 5세손, 증조부는 변을명(卞乙明), 조부는 변효생(卞孝生)이고, 부친 변신보(卞申甫)와 모친 동래정씨(東萊鄭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3세 때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으며, 25세에 어머니의 권고로 생원시(生員試)에 응시하여 3등으로 합격하였으나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37세에 현량과(賢良科)에 추천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는데 이 해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당시 사람들이 변벽이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다고 하였다. 그 후 평생을 성리(性理) 탐구에만 전념하였다.
1582년(선조 15)에는 사림(士林)에서 선생의 어짊을 기리어 서원을 세우자는 논의가 있었고, 1707년(숙종 33)에는 병암서원(屛巖書院)에 봉안되었다. 홀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손수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봉양하는 일을 평생토록 거르는 일이 없었다.
저서로는 『구산실기(龜山實紀)』와『구산선생문집(龜山先生文集)』이 있다.
『조선인명사서(朝鮮人名辭書)』에는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의 5세손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구산집(龜山集)』은 현재 일본(日本) 경도대학(京都大學) 하합문고(河合文庫)에도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龜山年譜
龜山實紀
姓號譜彙 /草溪
燃藜室記述
朝鮮人名辭書
朝鮮王朝實錄
知退堂集
春亭續集
春亭集
韓國系行譜
해외 소장 한국 전적 문화재(http://koreanbooks.nricp.go.kr)
龜山實紀
姓號譜彙 /草溪
燃藜室記述
朝鮮人名辭書
朝鮮王朝實錄
知退堂集
春亭續集
春亭集
韓國系行譜
해외 소장 한국 전적 문화재(http://koreanbooks.nricp.go.kr)
[집필자]
이은영
성명 : "변벽(卞璧)"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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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31 | 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